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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 치세 초기에 주조된 로마 데나리우스 한 닢을 손에 쥐어 보라. 그 무게와 은빛 광택을 느껴 보라. 사실상 순은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정한 기준대로 순도가 약 98%에 이른다. 대화재가 일어난 서기 64년, 네로는 이 주화의 무게를 줄이고 순도를 약 80%로 떨어뜨렸다. 재정 문제를 만든 것은 화재가 아니었다. 도시가 불타기 전 몇 해 동안 조폐소는 이미 주화를 조금씩 깎아 내고 있었다.

이번에는 갈리에누스 치세의 마지막 해인 268년에 나온 그 후손을 쥐어 보라. 옛 데나리우스를 유통에서 몰아낸, 방사관을 쓴 황제 초상의 “2데나리우스” 주화 안토니니아누스다. 은 함량은 약 5%에 불과하고, 이 주화를 찍어 낸 정부는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갓 주조된 주화는 하얗게 처리한 표면 덕분에 여전히 은화처럼 보일 수 있었지만, 그 얇은 막은 지갑 속에서 금세 닳아 없어졌다. 오늘날 금속학자들은 이런 주화의 심부를 드릴로 뚫거나 깨끗이 손질한 단면을 분석해, 그 주화를 만지던 사람 대부분이 어렴풋이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에 정확한 수치를 매긴다. 같은 무게로 따지면 손에 든 금속에 담긴 은은 조상 주화의 약 20분의 1이었다.

그 204년 동안 이 주화 계열은 은 함량을 약 75%포인트 잃었고,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기준에 견주면 90%포인트 넘게 잃었다.

로마 통화 체계의 붕괴가 제국이 정치적으로 무너지기 두 세기 전부터 주화의 금속에 읽을 수 있게 새겨져 있었다면, 그 밖에 또 무엇을 읽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렇게 읽힌다는 것은 로마만의 특성일까, 아니면 오스만 제국과 대영 제국, 소련에서도 되풀이될까?

이 글에서 살펴보는 모든 제국의 붕괴에는 다섯 가지 경제 신호가 이런저런 형태로 나타난다. 통화 잠식은 지출과 세입의 격차를 통화 체계가 허용하는 수단이라면 무엇으로든 메울 때 일어난다. 변경 비용의 팽창은 경계선을 유지하는 비용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나는 현상이다. 엘리트의 조세 포획은 과세에 저항할 정치권력을 쥔 이들이 실제로 저항해, 그 부담을 저항할 힘이 없는 이들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용병 대체는 역사적으로 군대를 공급하던 계층이 납세자 명부에서 빠져나가고, 제국이 비용을 댈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모병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혁 마비는 진지한 개혁이 시도되지만 어김없이 실패하는 것이다. 개혁을 실행할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위기를 낳는 메커니즘에 이해관계가 걸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사례에서 신호가 먼저 왔다. 역사가 원인으로 꼽는 침략과 군사적 참사, 정치 혁명은 재정적으로 쇠약해진 체제가 마침내 남은 역량을 넘어서는 시험을 받게 된 계기로 이해하는 편이 낫다.

통화 신호: 주화가 기록하는 것

아우구스투스와 초기 원수정 시대의 로마 데나리우스는 로마 기준으로 순은, 곧 순도 약 98%였다. 이 기준은 법으로 정해졌다기보다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주화는 대체로 일정한 금속 가치의 척도였고, 여기에 황제의 권위가 덧붙었다. 서기 64년 네로 치세에 은 함량은 약 80%로 떨어졌다. 수십 년 동안 화폐학자들은 개혁 이후의 수치를 93%로 보았지만, 주화 심부에서 뚫어 낸 금속을 분석하자 삭감 폭이 훨씬 컸던 것으로 드러났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치세에 은 함량은 약 50%까지 떨어졌다. 갈리에누스 치세에 이르면 데나리우스는 안토니니아누스에 자리를 내주었고, 그 주화의 은 함량은 약 5%까지 내려가 있었다.

세입의 상당 부분은 명목 금액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세금의 큰 몫이 주화로 부과되고 납부되었기 때문이다. 군사비는 주로 변경에서 불어나고 있었다. 격차는 어디선가 메워야 했는데, 그것을 메울 직접적인 방법, 곧 세금을 거부할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더 걷거나 제국의 정체성 일부가 된 변경의 책무를 내려놓는 일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격차는 조폐소에서 메워졌다. 조폐소는 주화 한 닢에 넣는 은을 줄이고, 명목 가치는 그대로 둔 채 더 많이 찍어 냈다. 그 결과는 인플레이션이었다. 물가는 이를 상쇄하려 올랐고 명목 세수보다 빨리 올랐으며, 세수의 실질 가치는 떨어졌다. 같은 실질 지출을 유지하려면 주화의 품위를 더 떨어뜨려야 했다. 이 순환은 멈칫하거나 부분적으로 회복하는 시기를 거치면서도 계속 돌았고, 더 빼낼 은이 사실상 남지 않을 때까지 이어졌다.

XRF 분석이 측정하는 것

미세 엑스선 형광 분석은 주화 표면에 엑스선을 쏘고, 그에 반응해 각 원소가 내놓는 형광 에너지를 측정한다. 원소마다 고유한 파장으로 빛을 내므로 은은 예측 가능한 한 주파수에서, 구리는 또 다른 주파수에서 신호를 낸다. 이 기법은 빠르고 시료를 훼손하지 않지만, 고대 주화에서는 바깥 껍질만 읽어 낸다. 수백 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으면 그 껍질에서 구리가 빠져나가므로, 품위가 떨어진 주화도 표면에서는 거의 순은으로 읽힐 수 있다. 한 실험실 시험에서 데나리우스의 표면은 은 약 95%로 측정되었지만, 연마한 심부에는 약 35%가 들어 있었다. 진지한 연구가 드릴로 뚫은 심부나 깨끗이 손질한 단면을 분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대로만 하면 이 측정은 품위 저하를 몸소 겪은 보통 사람들이 결코 갖지 못했던 것, 곧 정확하고 재현 가능한 숫자를 내놓는다. 서기 268년의 로마 병사는 주화의 무게를 달아 볼 수 있었고, 깨물어 볼 수 있었고, 상인들이 그 주화를 받기를 꺼리는 듯하다는 것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열에 아홉 이상 비금속이라는 숫자까지 매길 수는 없었다. 그 차이는 정치적으로 중요했다. 주화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정부는 그것이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공표할 필요가 없었고, 조폐 관리들은 누구도 누적 효과를 계산하지 않은 채 점진적인 변화를 실행했을지도 모른다.

금본위제 제국은 이에 맞먹는 물리적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그 대신 환율의 역사와 GDP 대비 부채 비율의 궤적을 살펴야 한다.

오스만 제국의 사례는 로마 밖에서도 같은 메커니즘이 작동함을 보여 준다. 1585~1586년 오스만 제국은 통화 위기를 겪었고, 악체의 은 함량은 단 한 해 만에 약 44% 줄었다. 그 원인 가운데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와의 장기전 비용이 얼마이고, 유럽과 지중해 시장으로 쏟아져 들어와 금에 대한 은의 값을 떨어뜨린 아메리카 은의 인플레이션 압력이 얼마인지는 아직도 논쟁거리다. 일단 시작되자 메커니즘은 같은 산술을 따랐다. 한 세기 안에 악체는 품위가 너무 떨어지고 불안정해져서, 1690년 국가는 이를 주된 통화 단위에서 내려놓고 새 은화 쿠루시를 도입했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오스만 국가도 세금으로는 메울 수 없는 지출과 세입의 격차를 안고 있었고, 그 격차를 대신 조폐소에서 메웠다.

영국 제국의 문제는 조폐소를 거치지 않았다. 파운드화는 금본위제와 정교한 은행 체계 위에 서 있었다. 은화 품위 저하에 기능적으로 맞먹는 영국의 수단은 평가절하였다.

영국은 1931년 금본위제를 정지했고, 파운드화는 그해 말까지 4.86달러에서 3.36달러로 떨어졌다. 석 달 만에 약 30% 하락한 것이다. 1949년에는 단 한 번의 정책 발표로 4.03달러에서 2.80달러로 공식 평가절하되었다. 하락할 때마다 영국이 해외에 진 파운드화 부채의 달러 가치는 줄었지만, 달러 부채와 수입품은 비싸졌다. 주화 품위 저하가 가져다준 것과 같은 조용한 부채 감가가 다른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변경 문제: 경계선 유지 비용이 중심부의 지불 능력을 넘어설 때

서기 2세기 중반, 군대가 로마 국가에 지우는 비용은 연간 6억~7억 세스테르티우스로 추산된다. 대략 10억 세스테르티우스였던 제국 예산의 절반을 훌쩍 넘고, 일부 추정으로는 4분의 3에 이르는 액수다. 경제 규모는 아마 200억 세스테르티우스쯤이었을 텐데, 이 수치도 측정이 아니라 재구성이다. 여기에 견주면 GDP의 약 3%다. 수치는 불확실하지만 요점은 그대로다. 군대가 세입 대부분을 빨아들이는 제국은 실수할 여유도, 다른 무엇에 쓸 돈도 없는 제국이다.

더 큰 문제는 궤적에 있었다. 로마는 스스로 비용을 대는 모델로 팽창해 왔다. 정복이 공물과 약탈품, 포로 노동력을 낳았다.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원정(서기 106년)은 금 약 165톤과 은 330톤을 거두어들였다고 전한다. 이 수치는 단 하나의 후대 사료, 곧 트라야누스의 주치의를 인용한 6세기 저술가에 기대고 있으며, 필사자가 부풀렸다고 의심한 한 근대 역사가가 10분의 1로 줄인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줄어든 수치는 널리 인용되지만 학계의 이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서기 117년 트라야누스가 죽은 뒤 변경이 고정되고 로마가 사실상 팽창을 멈추자, 군대 유지비를 거들던 횡재도 말라 버렸다. 속주들은 계속 세금을 냈지만 약탈품의 흐름은 끊겼고, 그 흐름이 떠받치던 기구는 줄어들지 않았다.

공세가 주는 보조금

제국 팽창의 경제 논리에서, 정복하는 제국은 군사 작전의 값을 원가 이하로 매길 수 있다. 점령한 영토에서 나오는 세입이 그 영토를 점령하는 비용을 보조하기 때문이다. 공화정과 초기 원수정 시기의 로마 군단은 전체로 보면 세입을 창출하는 사업체였다. 군단을 모집하고 유지하는 비용은 그들이 차지한 영토에서 회수되었다. 제국이 방어 태세로 돌아서고 군단이 정복의 엔진에서 국경 경비대로 바뀌자, 보조금은 사라졌지만 비용 구조는 그대로 남았다. 트라야누스 이후 어떤 황제도 서기 106년 그가 다키아에서 거둔 수확에 맞먹는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 이후 한 세기 동안, 공세의 보조금으로 비용을 치렀던 변경은 상쇄해 줄 새 정복도 없이 속주 세금에 붙은 고정 비용이 되었다.

이 문제의 영국판은 대략 187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이어진다. 영국의 세계적 책무를 떠받치는 경제 기반인 세계 산업 생산 점유율은 1870년 약 32%에서 1913년 약 14%로 떨어졌다. 영국의 상대적 경제 지위는 쪼그라들었지만, 제국의 책무는 줄기는커녕 계속 늘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의 공공부채는 GDP의 약 29%였다. 1918~1919년에는 143%에 이르렀다. 휴전 뒤에도 전후 불황으로 경제가 위축되면서 비율은 계속 올랐고, 1923년 약 186%로 전후 최고치를 찍었다. 그것이 40년 동안 세계 산업 점유율이 줄어들던 제국이 단 한 번의 대전쟁에 치른 재정적 대가였다.

이 현실에 대한 대응이 10년 규칙이었다. 1919년 8월 전시 내각이 채택하고 1928년 재무장관 처칠의 주장으로 해마다 자동 연장되는 규칙이 된 영국의 정책 가정으로, 제국이 향후 10년 안에 대규모 전쟁을 치르지 않을 것이므로 국방 계획과 지출은 10년의 평화를 전제로 해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흔히 전략적 순진함으로 묘사되지만, 영국의 군사 계획가들은 전략 환경을 대체로 알고 있었다. 이 규칙은 재정적 판단이었다. 영국이 명목상 방어하던 변경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겨난 규칙이었다.

소련은 1970년대와 1980년대를 보내며, 미국 정보기관 추정치로 GNP의 15~17%에 이르는 군사비 지출(비판자들은 25% 이상으로 보았다)이 생산성 증가율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는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갔다. 통상적인 성장 회계 방식으로 재면, 소련의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은 1960년대 연 약 1.5%에서 1970년대 초 0으로 떨어졌고, 1975년부터는 마이너스였다. 둔화하는 경제에서 그만한 몫을 변경에 쏟아붓는 한편 끊임없는 재정 지원이 필요한 종속국 네트워크까지 보조하던 제국은, 결국 어떤 소련 지도자도 내릴 수 없는 선택을 강요하게 될 변경 문제를 안고 있었다.

조세의 덫: 부자가 세금을 내지 않으면 누가 내는가

로마 조세 체계의 중심 수단은 트리부툼이었다. 속주 주민에게 부과하는 토지세였고, 시기에 따라서는 인두세이기도 했다. 로마의 상설 귀족층에 해당하는 원로원 계급은 공식적으로 면세된 적이 없었지만(콘스탄티누스는 원로원 의원의 토지에 특별세를 더 매기기까지 했다), 특혜 과세 평가와 납부 유예, 체납 탕감으로 실제 부담을 가볍게 유지할 영향력이 있었다. 황제들은 이런 혜택을 정치적 화폐로 내주었다. 너는 충성을 얻고, 나는 걷지 못한 세입을 얻는다. 하나하나의 혜택은 그 자체로는 정치적으로 앞뒤가 맞았다. 그러나 쌓이고 쌓이자 세입 기반이 속에서부터 비어 갔다.

4세기 무렵 제국 행정부는 가장 큰 원로원 영지에서 세금을 걷는 데 애를 먹었다. 그 소유주들은 어떤 소농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납부를 미루고, 협상하고, 탕감을 얻어 냈다. 행정부는 대신 저항할 힘이 가장 약한 사람들, 곧 소농과 특히 쿠리알레스에게 세율을 올렸다. 쿠리알레스는 세금을 걷을 법적 의무를 지고, 거둔 금액과 국가가 요구한 금액 사이의 부족분을 개인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도시 중간계급이었다. 이 압박에 많은 이가 파산했다. 세습직이었으므로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국가에는 병사가 있었으므로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든 버텨 내려 애쓰는 것뿐이었다.

로마의 쿠리알레스

쿠리알레스는 후기 제국의 도시 유지층이었다. 누구인지 드러날 만큼 이름이 났지만, 손댈 수 없을 만큼 부유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법적 의무는 관할 지역의 세금을 걷어, 실제로 얼마를 걷었든 상관없이 정해진 금액을 제국 국고에 바치는 것이었다. 흉작이 들거나, 소농이 달아나거나, 과세 대상 인구가 줄어들면 쿠리알리스는 그 차액을 자기 재산에서 메웠다. 4세기에 이르면 사람들은 징역형을 피해 달아나듯 쿠리알레스 신분에서 달아났다. 어떤 이는 성직에 들어갔다. 성직자는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더 큰 영지로 도망쳐 콜로누스, 곧 징세관이 압박하기에는 너무 강력한 원로원 귀족의 보호 아래 토지에 묶인 소작인이 되었다. 아예 자취를 감춘 이들도 있었다. 전형적인 희생자는 자기 재산이 감당할 수 없는 세금 부채 속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도시 유지였다. 그가 책임진 주민들은 한 가구씩, 그로서는 얻을 수 없는 면제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소농이 납세자 명부에서 빠져나가면서 문제는 더 커졌다. 한 가족이 땅을 버리고 원로원 영지의 보호 아래 들어가면, 그들은 경제적으로 여전히 생산적이었지만 그들의 세금은 징세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원로원 영지는 그들의 노동과 잉여를 흡수했고, 이제 그들을 대신해 책임지는 지주는 바로 국가가 압박하기 어려워하던 부류의 납세자였다. 가장 신뢰할 만한 현대의 재구성에 따르면 인구의 약 1.5%인 엘리트가 전체 소득의 대략 5분의 1을 가져갔다. 이런 역학이 뿌리내리기에 충분할 만큼 계층화된 경제였다. 부유층은 유인 구조가 합리적으로 만든 일을 했다. 부유할수록 세금 회피가 쉬워지는 체제 안에서, 과세 노출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자산을 사들였다.

오스만 제국의 티마르 제도는 같은 역학을 다른 제도의 옷을 입혀 보여 준다. 티마르는 군역의 대가로 기병인 시파히에게 내준 수여지였다. 티마르는 결코 세금 면제가 아니었다. 세입을 배정하는 것이었고, 시파히는 봉급 대신 농민의 조세를 거두었다. 이 제도는 제국이 팽창하는 동안에는 잘 돌아갔다. 정복한 영토의 세입을 배정하고 그 대가로 군역을 요구하면, 국고에서 봉급을 주지 않고도 제 기능을 하는 기병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화약 무기를 갖춘 상비군이 지방 기병을 쓸모없게 만들자 제도는 쇠퇴했다. 마흐무트 2세는 1831년 이 제도를 해체하기 시작했고, 1844년의 칙령으로 마지막 티마르 보유자들은 은퇴하거나 봉급을 받는 직무로 옮겨졌다. 이어 탄지마트 근대화 개혁의 일부인 1858년 토지법은 국유지를 그 땅을 실제로 경작하는 개별 농민 명의로 등록해, 농민 하나하나를 국고와 직접 잇고자 했다. 그러나 이라크 같은 지방에서는 오스만판 원로원 계급이라 할 부족 셰이크와 도시 유력자들이 대신 광대한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등록했다.

영국의 사례는 다른 제도를 거쳐 같은 길을 간다. 영국령 인도는 재정적으로 자립했고, 그 이상이었다. 제국 방위비를 분담하고, 자신을 점령한 행정의 비용을 대고, 잉여를 본국 중심부로 보냈다. 재정적으로 보면 인도 주민은 로마의 소농이었다. 더 많이 내고 덜 받으면서, 본국의 설계자와 관리자는 그 부담에서 비켜나 있는 체제를 떠받쳤다. P. J. 케인과 A. G. 홉킨스는 이른바 신사 자본주의에 관한 저작에서, 제국 팽창을 이끌고 그 수익을 거둬 간 것은 산업보다는 런던 시티를 중심으로 한 금융·지주 세력이었다고 주장한다.

용병의 문턱: 자기 군대를 감당할 수 없게 될 때

포이데라티는 3세기부터 로마 군사사에 등장해 4세기에는 제국 방위의 중심이 되었다. 군단에 편입되지 않고 로마와 맺은 조약에 따라 자기 지휘관 아래 싸운 이민족 부대였다. 그들이 부상한 데에는 전략적 원인뿐 아니라 재정적 원인도 있었다.

로마 병사들은 주화로 봉급을 받았다. 그 주화가 은 함량을 잃어 가자 물가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카라칼라가 단행한 대폭 인상마저 앞질렀다. 병사들은 화폐 대신 현물로 지급하라고 요구했고, 사기라고 여긴 조건으로는 복무를 거부했으며,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믿음직한 군단병을 공급하던 소농 계층은 원로원 영지 속으로, 그리고 무너져 가는 쿠리알레스의 중간층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제국은 병사가 필요했지만, 줄어드는 인구에서 뽑은 병사들에게 가치 있는 돈으로 봉급을 줄 형편이 못 되었다. 포이데라티가 그 빈틈을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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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78년 아드리아노플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은 이 메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서기 376년 발렌스 황제는 고트족의 대규모 도나우강 도하를 허락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그 계산을 기록해 두었다. 고트족이 신병을 대거 공급할 것이고, 속주들은 해마다 바치던 징집병 대신 금을 낼 수 있으니, 새 병사와 새 세입을 한꺼번에 얻게 된다는 것이었다. 재정 논리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런데 로마 관리들은 고트족 정착민을 갈취하고 굶주리게 했다. 개고기에 터무니없는 값을 매기고, 식량을 주는 대가로 고트족 아이들을 노예로 넘겨받았다. 동족이 굶어 죽어 가는 상황에 처한 고트족 지도부는 반란을 일으켰다. 2년 뒤 아드리아노플에서 동로마 야전군은 궤멸했다. 발렌스 자신이 전장에서 죽었고, 그가 이끈 군대의 3분의 2가 단 한나절 만에 사라졌다. 이 참사를 물려받은 테오도시우스는 할 수 있는 만큼 군을 재건했지만 전장에서 고트족을 섬멸하지는 못했다. 382년 그는 조약으로 타협했다. 사라진 조약 조항을 역사가들이 대개 재구성하는 바에 따르면, 이 조약으로 고트족은 포이데라티가 되었다. 로마 영토 안에 살면서 자기 지휘관 아래 싸우게 된 것이다.

아드리아노플의 재정 함정

서기 376년 고트족의 도나우강 도하는 애초에 세입 계획이었다. 속주들은 징집병 공출을 금으로 대신하고, 제국은 변경 토지에 쓸 농업 노동력을 얻으며, 자국 주민에게서 병력을 모으는 비용을 들이지 않고 신병을 확보할 터였다. 이 세입 계획이 군사적 참사로 이어진 까닭은, 계획을 실행하는 관리들이 갈취로 단기적인 사적 수입까지 챙기고 있었고, 고트족 정착민은 바로 그 관리들이 통제하는 보급품에 전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는 전장에 투입한 군대의 3분의 2를 잃었고, 이 전투는 서기 476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폐위로 끝나는 일련의 과정의 시작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는 모든 세습 군사 계급이 낳는 문제, 곧 술탄보다 가문이나 씨족, 지역 정체성에 먼저 충성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 명시적으로 고안된 제도였다. 그들은 노예로 충원되었다. 데브시르메라는 징발로 끌려온 기독교도 소년들이 오스만의 복무 체계 안에서 길러져 술탄 말고는 어디에도 충성할 곳이 없게 되었다. 제국이 정복을 거듭하던 위대한 시대 내내 그들은 제국이 가진 가장 효과적인 군사력이었다. 17세기에 이르면 그들은 이름만 아닐 뿐 사실상 세습 집단이 되어 세금을 면제받고, 콘스탄티노플에서 상업을 벌이며, 제국에 필요한 어떤 군사 근대화도 가로막는 주된 제도적 장애물이 되어 있었다. 1826년 마흐무트 2세는 그들을 해체하고 학살했다. 이 사건은 바카이 하이리예, 곧 “상서로운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제국의 군사 역량은 일시적으로 붕괴했다. 적절한 대안을 마련해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국의 방위보다 자기 보존을 앞세우는 부대에 봉급을 주는 일은, 학살로 끝나기 전 수십 년 동안 무거운 부담이었다.

영국령 인도군은 재정 메커니즘으로서의 용병 대체를 가장 분명하게 기록으로 남긴 사례다. 19세기에 걸쳐 동인도회사 군대에서 인도인 병력은 영국인 병력보다 평균 약 7 대 1의 비율로 많았다. 1857년 이후 영국령 인도군은 “전투 종족” 교리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경제적 처지 때문에 믿을 만하고 값싼 군사 노동력이 되는 민족·종교 집단을 골라 모병하는 방식이었다. 찰스 밀러는 전투 종족 제도에 제도적 논리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바깥에서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빈약하고 집단 내부의 규율이 엄격해 탈영과 태업의 대가가 큰, 결속이 단단한 소수 집단에서 거듭 모병했다는 것이다. 식민지 인도군의 재원은 영국이 아니라 인도의 세입이었다. 영국은 변경 비용을 먼저 잠재적 적으로부터 지키던 바로 그 영토에, 이어 그 영토의 주민에게 떠넘겼다. 정복당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점령과 더 넓은 제국의 군사 작전에 돈을 대고 있었다.

소련의 종속국 체제는 같은 논리를 더 넓은 지리적 규모로 따른다. 1970년대 말 소련은 만성적인 무역 적자에 시달리던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의 경제를 보조하고, 앙골라 등지의 작전에 쓰일 쿠바의 군사력을 유지시키고, 미국과의 전쟁 이후 베트남의 재건에 돈을 대고, 중동과 아프리카 곳곳의 대리 세력을 지원하고 있었다. 영국령 인도군 모델과 다른 점은 소련의 종속국들이 세입을 낳기는커녕 순비용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지는 비슷했다. 제국의 군사적 경계선은 일부분, 제국이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군대가 제국이 마음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정치적 약정 아래 지키고 있었다.

개혁의 자물쇠: 고칠 수 있는 사람들이 고치지 못하는 이유

284~305년에 재위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보기 드물게 명확히 위기를 이해했다. 서기 301년의 최고가격령은 제국 전역의 가격에 상한을 두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 했다. 더는 이윤을 남기고 팔 수 없게 된 상인들은 물건을 거둬들였고, 칙령은 결국 폐기되었다. 그의 조세 개혁은 더 큰 결과를 낳았다. 그는 3세기의 불규칙한 현물 징발을 곡물, 기름, 가축 같은 품목에 대한 정기적이고 표준화된 부과로 바꾸었다. 이로써 부담의 상당 부분이 화폐세에서 옮겨 갔고, 통화가 더는 믿을 만한 회계 단위가 아님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셈이 되었다. 실재하는 문제에 대한 정교한 대응이었고, 이 개혁으로 제국은 수십 년 동안 안정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권력자들에게 제 몫을 내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이탈리아가 오래 누려 온 토지세 면제를 폐지하기까지 했지만, 대지주들은 유리한 과세 평가와 납부 유예, 탕감을 얻어 낼 영향력을 여전히 쥐고 있었다. 황제의 권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치 연합에는 원로원 계급과, 그들이 협조해야 행정이 돌아가는 속주 엘리트가 들어 있었다. 그들에게 세금을 물리면 인기를 잃었을 것이고, 더 나쁘게는 다른 어떤 개혁을 실행하는 데에도 필요한 권력 기반을 허물었을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은 진지하고 지적이었지만, 그것을 지탱할 정치경제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목표에 미치지 못했다.

1839~1876년의 탄지마트 개혁은 오스만 역사에서 가장 꾸준히 이어진 근대화 시도였다. 개혁가들은 재정 상황과 그 원인을 이해했고, 유럽의 기술·금융 모델에도 접근할 수 있었다. 그들을 꺾은 것은 정체를 알면서도 이겨 낼 수 없던 반대 세력이었다. 지주 계급은 1858년 토지 개혁을 장악해, 경작자 명의로 토지를 등록하려던 법을 대영지를 합법화하는 장치로 바꿔 놓았다. 1874~1875년 오스만 정부는 예산의 절반 이상을 외채 상환에 쓰고 있었다. 첫 외채는 크림 전쟁 중이던 1854년에 들여왔고, 1875년 무렵 명목 공공부채 잔액은 2억 파운드 이상에 이르렀다. 이 부채는 기존 질서에서 이익을 보는 계급이 세입 기반을 조직적으로 장악해 가는 가운데 변경 비용과 근대화 비용을 동시에 대려 한 결과였다. 개혁가들에게는 포고령을 낼 권한은 있었지만, 실행에 협조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의 이익을 거슬러 포고령을 집행할 힘은 없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가장 분명한 현대의 사례다. 자료가 아주 방대하고 최근의 것이라는 점도 한 이유다. 그는 소련 체제에 대한 공식 권한을 쥐고 지시를 내렸지만, 지시는 이행되지 않았거나, 바꾸려던 이해관계를 보존하는 형태로 이행되었다. 상황이 나빠지자 고르바초프는 결정을 내릴 권한을 늘리는 데 집중했지만, 결정을 집행할 힘은 기르지 못했다. “그는 헌법상의 독재자가 되었다. 다만 서류상으로만.” 집행은 노멘클라투라에 달려 있었다. 노멘클라투라는 지위와 소득, 사회적 신분을 전적으로 페레스트로이카가 재편하려던 바로 그 체제에서 얻는 관료와 산업 관리자들이었다. 가격 통제를 풀면 눈에 보이는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위험이 있었고, 이는 정치적 재앙이 될 터였다. 게다가 가격 통제 해제는 어차피 제대로 작동하는 가격 체계를 전제로 했는데, 그런 체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유화는 노멘클라투라에게서 기업 통제권을 빼앗았을 것이고, 고르바초프는 온전한 시장경제를 세울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국가 소유는 그대로 남았다. 정량적 생산 목표는 가격 메커니즘 없이는 버릴 수 없었는데, 바로 그 메커니즘이 없다는 사실이 다른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핵심에 놓인 어정쩡한 조치는 기업 관리자들에게 자율성을 주면서도 국가 소유와 생산 목표, 가격 통제는 그대로 둔 것이었고, 이 조합은 시장 대신 물자 부족과 억압된 인플레이션을 낳았다.

1925년 영국이 전쟁 전 평가로 금본위제에 복귀한 일은 같은 자물쇠의 더 작은 사례다. 케인스는 파운드화를 전쟁 전 환율인 4.86달러로 되돌리면 영국 수출품이 비싸져 국제 시장에서 밀려나고 실업이 생길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1926년 총파업이 뒤따랐고, 영국은 결국 1931년 금본위제를 떠났다. 전쟁 전 평가로 복귀하는 결정을 내린 사람은 재무장관 처칠이었다. 그는 반대 논거를 몰라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속으로 이 정책을 의심했고, 잉글랜드 은행 총재 몬터규 노먼을 논쟁으로 이길 수 있을지도 의심했다. 그는 잉글랜드 은행과 재무부, 런던 시티에 떠밀려 갔다. 런던 시티란 파운드화가 국제적 역할을 유지해야 이윤을 내는 금융기관과 은행, 국제 투자회사들이었고, 노동당과 노동조합에까지 퍼진 금본위 합의를 등에 업은 그들의 무게는 재무부 의사 결정에서 다른 대안이 들어설 정치적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런던 시티는 로마 원로원 계급과 오스만 지주 계급의 영국판이었다. 쇠퇴를 막는 데 가장 필요한 개혁을 저지할 힘이 가장 큰 세력이었고, 1925년에는 그 힘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썼다.

네 사례에는 같은 정치 논리가 흐른다. 어느 경우든 개혁을 실행할 힘을 가진 세력은 개혁이 일어나면 자기 지위를 잃을 세력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현물 조세를 개혁했지만 대지주들에게 세금을 내게 하지는 못했다. 탄지마트 개혁가들은 지주들에게 강제할 수 없는 토지 개혁 포고령을 냈고, 고르바초프는 서류 위에서만 헌법상의 독재자가 되었으며, 처칠은 정책을 의심하면서도 4.86달러로 금본위제에 복귀할 수 있었다.

수렴: 다섯 신호, 하나의 기계

이 네 사례에서 다섯 신호는 스스로 강화되는 하나의 체계로 작동했다. 말기적 쇠퇴를 제국이 으레 흡수하고 살아남는 좌절이나 위기와 갈라놓은 것은 이 신호들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사실이었다.

되먹임 고리는 이렇게 돈다. 통화 잠식은 군인 봉급을 실질적으로 깎는다. 실질 봉급 삭감에, 역사적으로 믿음직한 신병을 공급하던 소농 계층의 축소가 겹치면, 국가는 자기 납세 신민에게서 모집하지 않았고 완전히 통제할 수도 없는 병사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포이데라티, 제 잇속만 차리게 된 예니체리 부대, 식민지 군대, 종속국의 대리 세력이 그들이다. 변경 비용이 계속 오르는 동안 자기 군사력에 대한 국가의 장악력은 약해진다. 늘어나는 변경 비용은 더 많은 통화 잠식이나 더 많은 부채를 요구한다. 재정 격차 때문에 국가는 과세에 저항할 힘이 가장 약한 이들을 더 세게 짓누른다. 소농과 식민지 기반은 면세 특권이나 원로원 영지, 수도원으로 달아나거나 지리적으로 흩어지면서 더 줄어든다. 세원이 줄어든다. 통화 잠식이나 부채가 빨라진다. 고리를 끊을 개혁은 이 고리에서 이익을 얻는 사람들에게 가로막힌다. 고리는 어떤 충격이 쇠약해진 체제가 더는 흡수할 수 없는 하중을 가할 때까지 돌아간다.

여기서 다룬 모든 사례에서 수렴은 붕괴보다 수십 년, 로마의 경우에는 수 세기 앞섰다. 로마 데나리우스의 은 함량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치세에 이미 50%였다. 알라리크가 로마를 약탈한 서기 410년보다 두 세기 앞선 일이다. 오스만 예산은 1908년 청년튀르크 혁명보다 한 세대 앞선 1870년대 중반에 이미 세입의 절반 넘게 부채 상환에 쓰고 있었다. 영국 부채는 1923년 GDP의 약 186%로 전후 최고치에 이르렀고, 영국이 인도를 내놓기까지는 그 뒤로도 사반세기가 걸렸다. 소련의 총요소생산성 증가는 1991년보다 20년 앞선 1970년대 초에 이미 멈춰 있었다.

이 시차가 중요한 이유는, 정치적 사건(전투, 혁명, 독립운동, 해체)이 일어날 즈음이면 그에 대응하는 데 필요했을 경제 체제가 이미 사라져 있기 때문이다. 알라리크의 서고트족이 로마를 약탈한 것은 그들을 막았을 제국이 200년 동안 서서히 말라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도 독립운동에는 도덕적 힘이 있었고, 동시에 그 운동이 마주한 것은 1945년 이후 운동을 진압하는 데 필요했을 군사 작전에 돈을 댈 수 없는 영국이었다. 소련의 생산성은 1979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성장을 멈췄다. 전쟁은 비용을 더하고 정당성을 갉아먹었으며, 1986년의 유가 폭락은 그 정체를 가려 주던 경화 수입을 잘라 냈다.

수렴의 속도

재정 질환의 첫 뚜렷한 신호에서 정치적 붕괴까지의 간격은 사례마다 다르며, 시간이 흐를수록 짧아진다. 로마의 완전한 수렴은 네로 치세의 초기 품위 저하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위기관리를 거쳐 서로마 제국의 붕괴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에 걸쳐 있다. 오스만의 수렴은 1585년 통화 위기에서 탄지마트의 실패를 거쳐 1908년 혁명과 뒤이은 해체까지 300년이 넘는다. 영국의 수렴은 1870년대의 산업 쇠퇴에서 1920년대 부채 위기를 거쳐 1947년 인도 독립까지 약 70~80년이지만, 탈식민화는 그 뒤로도 20년을 더 이어졌다. 소련의 수렴은 1970년대 초 생산성 정체에서 1991년까지 약 20년이다. 종점들을 엄밀하게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 가속의 유력한 이유는 후대의 제국들이 경제적으로 더 긴밀하게 통합된 세계 체제 안에서 움직였고, 그곳에서는 되먹임이 더 빨리 돌았다는 데 있다. 통화 위기는 몇 주 안에 국제적으로 번졌고, 부채 시장은 국가 위험을 실시간으로 재평가했으며, 적국과 종속국은 변경의 책무가 더는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더 일찍 알아챘다.

1940년대 후반 대영 제국의 파운드화 위기는 마지막 가속 단계에 들어선 수렴을 보여 준다. 1947년 태환 위기로 영국의 달러 보유고는 주당 1억 달러를 훌쩍 넘는 속도로 빠져나갔고, 5주 만에 영국은 태환을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이 강대국 지위를 내세우는 으뜸가는 근거였던 통화에서 돈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것이다. 1949년의 30.5% 평가절하는 신호를 명시적으로 만들었다. 파운드화는 더 이상 옛 환율로 유지될 수 없었다. 그 무렵 영국은 이미 인도와 팔레스타인에서 물러났고, 유럽과 그 밖에서 유지한 책무는 여전히 미국의 신용에 기대고 있었다. 변경 신호와 통화 신호가 함께 움직이고 있었고, 평가절하는 같은 청산의 일부로서 제국 철수와 나란히 찾아왔다. 로마에 아드리아노플이 있었다면 영국에는 1947년이 있었다. 이미 쇠약해진 체제가 더는 감당할 수 없는 하중으로 시험받고, 그 결과가 지켜보는 모든 이의 눈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서기 64년 로마 병사의 손에 들린 주화는 이미 앞으로 닥칠 일의 신호를 품고 있었다. 그 주화는 서고트족의 도하도, 약탈도, 그 날짜도 예언할 수 없었지만, 나아가는 방향과 그 방향을 몰아가는 산술은 담고 있었다. 1923년 GDP 대비 부채 비율을 읽던 영국 재무부 관리에게도, 1985년 정체된 소련의 총요소생산성을 들여다보던 CIA 분석가에게도 같은 신호가 있었다.

서기 200년 무렵의 로마에서 누군가 이 흐름을 멈추려면 무엇이 사실이어야 했을까? 데나리우스의 은 함량은 여전히 50% 안팎이었다. 나빴지만 아직 파국은 아니었다. 변경은 비쌌지만 군단은 아직 제 기능을 했다. 원로원 계급은 제 몫보다 훨씬 적게 냈지만, 경제가 충분한 잉여를 내고 있었기에 이 가벼운 부담은 아직 치명적이지 않았다. 서기 200년 무렵의 진지한 개혁가라면 초기 형태의 다섯 신호를 모두 살펴보고, 그 궤적을 이해하고, 뻔한 처방을 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통화 규율을 되살리고, 변경의 책무를 억제하고, 원로원 영지에 과세하고, 소농 기반을 재건하고, 직업 군단의 역량에 투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을 실행해야 했을 사람들은 영지에 세금이 매겨질 원로원 의원들, 변경 지휘권이 제약될 장군들, 재량권을 빼앗길 조폐 관리들, 조세 특권을 박탈당할 속주 엘리트였다.

주화는 결정이 쌓이면서 계속 은을 잃었다. 그 결정 하나하나는 결정을 내린 사람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선택지로 보였다. 품위가 떨어진 주화를 받는 병사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봉급이 그 주화로 나왔기 때문이다. 값을 올린 상인은 주화의 가치 하락에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원로원 영지로 달아난 소농은 살아남으려고 그렇게 했고, 더 가벼운 과세 평가를 밀어붙인 원로원 의원은 체제가 인정한 특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주화는 계속 이 손에서 저 손으로 건너갔고, 개별 거래 하나하나의 안에서 보면 체제는 제대로 돌아가는 화폐경제처럼 보였다. 두 세기에 걸친 은 함량 75%포인트의 하락은 그 어떤 거래에도 드러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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