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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0년대 안트베르펜은 세계가 그때까지 만들어낸 가장 정교한 금융시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환어음, 해상보험, 상품 선물, 외환 거래가 모두 하나의 거래소에서 동시에 돌아갔다. 1531년 문을 연 이 거래소는 상인들이 날마다 만나 거래하도록 처음부터 그 목적으로 지은 최초의 건물이었고, 곧 유럽 곳곳 거래소의 본보기가 되었다. 포르투갈 설탕 대리인들이 스페인 은 취급업자, 플랑드르 직물 수출업자, 잉글랜드 양모 상인, 독일 은행 가문과 나란히 일했다. 아무리 이국적인 거래라도 안트베르펜에서는 지상의 어느 곳보다 좋은 조건으로 자금을 조달하고 보험을 들고 결제할 수 있었다.

1576년 11월 4일, 반란을 일으킨 스페인 테르시오 부대가 도시로 쳐들어왔다. 그들은 펠리페 2세에게서 몇 년째 급료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바로 그 군주의 재정은 그의 병사들이 이제 막 파괴하려는 금융 기구에 기대고 있었다. 며칠 동안 약탈이 이어졌다. 제프리 파커는 사망자를 약 8,000명으로 보았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민간인 약 2,500명이라는 수치를 더 자주 쓴다. 당대의 집계는 훨씬 높아서, 전국신분회의는 1만 8,000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파커는 이를 “안트베르펜의 홀로코스트”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장은 끝내 예전 모습을 되찾지 못했다. 안트베르펜은 9년을 더 절뚝거리며 버텼고, 1585년 스페인군이 도시를 완전히 손에 넣었다. 그러자 대대로 이어진 상업 전통 속에 뿌리내리고 그 전통의 뒷받침을 받던, 당대 가장 복잡한 금융 체제가 북쪽으로 빠져나갔다.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암스테르담은 안트베르펜이 하던 일을, 그리고 그 이상을 해내고 있었다. 안트베르펜은 17세기에도, 그 뒤 어느 때에도 그 지위를 되찾지 못했다.

흔한 설명

반사적으로 나오는 답은 지리, 항구, 제국, 안정이 뒤섞인 무언가다. 이 요인들은 저마다 어딘가에서는 중요했지만, 그 어느 것도 승자와 패자를 가르지는 못한다.

함부르크에는 독일 최초의 거래소 가운데 하나가 있었다. 1558년 트로스트브뤼케 근처에 세워진 거래소다. 자치 도시공화국 함부르크는 개신교 상인 문화를 지녔고 북유럽의 대항구 가운데 하나였다. 17세기 후반에는 시장으로서 암스테르담, 런던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함부르크는 만만찮은 금융 중심지가 되었지만, 유럽의 금융 수도가 되지는 못했다.

빈은 300년 동안 유럽 대륙의 거대 제국 가운데 하나의 중심에 있었다. 1910년 무렵 그 제국은 인구 5,100만 명이 넘는 국가였다. 1830년대에는 빈의 로스차일드 가문이 오스트리아 최초의 증기 철도인 카이저 페르디난트 북부철도에 자금을 댔다.

20세기에 이르자 빈의 거대 겸업은행들이 오스트리아 금융을 지배했다. 그러다 도나우강 변의 바로 그 자리에서 금융 체제가 안으로 무너져 내렸다.

크레디트안슈탈트, 1931년 5월

1931년 5월 11일, 오스트리아 금융 체제 전체 자산의 27%를 보유한 “슈퍼 은행”이자 오스트리아 최대 은행이 1930년 대차대조표에서 자기자본의 약 85%에 해당하는 1억 4,000만 실링의 손실이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최종 손실 규모는 10억 실링을 넘었다.

정부가 이 은행의 부채 12억 실링 뒤를 받치고 나섰을 때, 정부는 연방 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보증을 짊어진 셈이었다. 연쇄 붕괴는 빈에서 중부 유럽 전역으로, 그리고 그 너머 헝가리와 독일, 그 이웃 나라들로 번졌다. 그해 9월, 빈의 한 은행이 지급불능을 시인한 지 넉 달 만에 영국은 금본위제를 떠났다.

그리고 시카고가 있다. 국제 금융의 입지로는 뉴욕보다 못한 곳이다. 대양 항구도 없고, 유럽 자본과 가깝지도 않고, 국제 은행업이 모여 있지도 않다. 그런데도 시카고는 세계를 주도하는 파생상품 단지 가운데 하나인 CME그룹을 키워냈다. 2025년 거래 계약 수 기준 세계 4위이며, 인도와 브라질 밖에서는 가장 큰 파생상품 거래소다.

이 도시들의 운명을 가른 것이 무엇이든, 지도만은 아니었다.

안트베르펜이라는 원형

안트베르펜이 쌓아 올렸다가 잃어버린 것은 하나의 제도적 층위 구조였다. 여러 금융 혁신이 특정한 방식으로 겹겹이 짜인 구성으로, 그 가치는 모든 구성 요소가 한자리에 함께 있다는 데서 나왔다.

거래소는 가격 발견에 영구적인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상인들은 1531년보다 훨씬 전부터 브뤼허에서, 그리고 안트베르펜의 거리에서 만나 어음을 거래했다. 하지만 새 건물은 거래를 날마다 한곳에 모았고, 가격을 더 공개적이고 연속적이며 경쟁적으로 만들었다.

거래소의 계보

안트베르펜 거래소는 북유럽 거래소들이 의식적으로 베낀 원형이 되었다. 잉글랜드 왕실의 재정 대리인으로 안트베르펜에서 여러 해를 보낸 토머스 그레셤은 이를 본떠 런던 왕립거래소를 세웠고, 1571년 엘리자베스 1세가 이를 개장했다. 헨드릭 더 케이서르가 설계해 1611년 완공한 암스테르담 거래소는 이 모델을 전용 건축물로 재현했다. 이 제도적 형태가 퍼져 나간 것은 잘 작동했기 때문이고, 복제품을 만든 사람들이 원본을 직접 써 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양도 가능한 환어음은 신용을 대체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신용을 제공한 상인은 그 채권을 배서해 제3자에게 넘길 수 있었고, 그 제3자는 다시 배서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주화를 옮기지 않고도 채무를 청산할 수 있는, 유동성 있는 채무 유통시장이 생겨났다. 해상보험은 항해의 위험을 개별 상인에게 몰아주는 대신 보험인수인들의 시장 전체에 나누어 지게 했다.

이 모든 것을 묶어 준 것은 밀도였다. 포르투갈, 스페인, 플랑드르, 잉글랜드, 독일의 중개자들이 한곳에서 활동했고, 저마다 다른 이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필요로 했다. 각 서비스는 다른 모든 서비스가 같은 거리에 있었기에 더 큰 가치를 지녔다. 상인들을 빼내면 층위 구조 전체가 한꺼번에 무너졌다.

1585년 이후 상인들은 떠났다. 1609년에는 남네덜란드 출신 상인 약 450명이 암스테르담에서 거래하고 있었다. 이 도시 상인 공동체 전체의 3분의 1이었다. 그들은 이미 발트해 무역으로 부를 쌓은 현지 상인 계층에 합류했고, 자본과 함께 이 층위 구조가 돌아가는 방식에 관한 실무 지식을 가져왔다. 누가 누구를 믿는지, 어음에 어떻게 배서하는지, 보험료를 어떻게 매기는지에 관한 지식이었다.

암스테르담이라는 우연

암스테르담은 계획하지 않은 채 금융 수도가 되었고, 그렇게 만든 데에는 이 도시가 받아들인 난민 위기의 몫이 컸다.

1576년 스페인의 광란은 군사적 폭력이었고, 도시는 폭력에서 회복할 수 있다. 결정적 순간은 1585년 8월 17일에 왔다.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의 포위, 안트베르펜의 항복, 그리고 도시의 개신교도 주민에게 떠날 시간으로 4년을 준 조약이다. 떠난 이들은 아무나가 아니었다. 수십 명은 자리를 잡은 안트베르펜 상인이었고, 대부분은 남네덜란드 각지에서 온 형편이 넉넉지 않은 젊은 상인이었다. 그들은 그 상업 세계 안에서 자랐고, 암스테르담에서 일구게 될 경력의 출발점에 서 있었다. 그들의 돈과 함께 상업 노하우, 그리고 신용이 기대던 인간관계가 떠났다.

암스테르담은 이렇게 물려받은 토대 위에 안트베르펜이 이룬 그 무엇도 넘어서는 두 가지 혁신을 세웠다.

비설방크로 알려진 암스테르담은행은 1609년 1월 31일 설립되어, 수십 년 동안 상업 생활을 괴롭혀 온 마찰을 해결했다. 바로 여러 주화가 뒤섞인 혼란이었다. 연합주에는 주와 도시의 조폐소가 누더기처럼 흩어져 있었고, 그 산출물과 나란히 은 함량이 제각각인 외국 주화가 셀 수 없이 유통되었다. 비설방크는 은행화폐라는 공통 단위로 표준화된 교환을 제공했다. 그 뒤 수십 년에 걸쳐 은행화폐는 유통되는 주화와 별개인 회계 단위로 기능하게 되었고, 훗날의 중앙은행들은 이 방식을 바탕으로 삼았다. 비설방크는 또한 토대의 마찰을 없앰으로써 암스테르담의 다른 모든 금융 거래를 더 싸게 만들었다.

1602년 3월 특허장을 받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는 더 급진적인 일을 했다. 이전의 상업 사업은 한 번의 항해를 위해 자본을 모았고, 투자자들은 배가 돌아오면 돈을 받았다. VOC의 특허장은 21년 동안 유효했다. 투자자들은 자본을 10년 동안 묶어 두어야 했고, 그들의 책임은 납입한 금액까지로 한정되었다. 암스테르담 지부는 1,100명이 넘는 최초 청약자에게서 360만 길더 넘게 모았다. 수만 길더를 넣은 상인부터 100길더 남짓을 청약한 소액 저축자까지 다양했다. 일찍 빠져나가고 싶은 투자자는 지분을 다른 누군가에게 팔아야 했다. 그 필요 때문에 주식 유통시장이 생겨났다. 주식 거래는 처음에는 암스테르담의 니우어 브뤼흐 위 노천에서, 1611년부터는 새 거래소에서 이루어졌다. VOC 주식은 안트베르펜이 상상조차 못 한 새로운 종류의 거래 가능한 금융상품이 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이어 1585년부터 1795년까지 스헬더강을 봉쇄함으로써 구조적 우위를 굳혔다. 안트베르펜에는 건물도, 법 전통도, 지리적 위치도 그대로 남았지만, 바다로 가는 길이 끊긴 항구에는 어느 것도 별 쓸모가 없었다.

스헬더강 봉쇄는 1795년에 풀렸다. 안트베르펜 항구가 다시 열렸고, 실재했던 지리적 이점도 되살아났다. 그래도 이 도시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조립하지 못했다. 같은 상인 디아스포라의 일부를 받아들였고 암스테르담이 가진 지리적 이점을 모두 갖춘 함부르크 역시 암스테르담이 한 일을 해내지 못했다. 최초의 충격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새 질서를 붙들어 두었고, 원래의 원인이 사라진 뒤에도 되돌아가는 것을 막았다.

고착의 메커니즘

그것을 붙들어 둔 것은 되먹임 고리였다. 자본의 풀이 크면 거래 스프레드가 좁아진다. 시장이 클수록 어떤 가격에서든 자연스러운 매수자와 매도자가 더 많기 때문이다. 좁은 스프레드는 중개자를 끌어들인다. 브로커, 변호사, 회계사, 보험업자가 모여드는 것은 거래량이 그들이 거기 있을 이유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중개자가 늘면 정보 비용이 줄어든다. 특이한 거래는 상대방을 찾고, 법적 문제는 선례를 찾고, 복잡한 구조는 전에 그런 것을 만들어 본 사람을 찾는다. 정보 비용이 낮아지면 더 많은 자본이 몰려오고, 고리는 복리처럼 불어나서 초기의 작은 우위가 나중의 큰 우위가 되고, 큰 우위는 사실상 영구적인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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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리는 유럽의 금융 중심이 왜 한 도시에서 다음 도시로 옮겨 갔는지, 그리고 왜 매번 옮겨 간 자리에 눌러앉았는지를 상당 부분 설명해 준다. 도전자에게는 조금 더 나은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존 중심지가 물리적으로 제공할 수 없는 무언가를 내놓아야 한다. 암스테르담은 안트베르펜의 난민들에게 작동하는 시장을 내주었다. 스헬더강이 봉쇄된 안트베르펜은 더 이상 내줄 수 없는 것이었다.

시카고: 규제의 빈틈

1972년 5월 16일, CME는 통화 선물을 출시했다. 이 상품은 열거된 농산물만 관할하던 상품거래청의 관할 밖에 있었고, 증권을 관할하던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관할 밖에도 있었다. 통화 선물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이 상품은 1975년까지 연방 감독이 전혀 없는 규제 공백 속에서 거래되었다. 그해 새로 만들어진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가 이른바 “이전에 규제받지 않던” 상품의 거래를 계속해도 된다고 명시적으로 승인했다. 시카고는 주식에서 뉴욕과 맞붙는 대신, 아직 어떤 규제 기관도 관할하지 않는 공간에서 통화 선물을 성공시켰다. 2007년 CME는 시카고상품거래소와 합병해 파생상품 공룡 CME그룹이 되었다. 하지만 시카고는 끝내 종합 금융 수도가 되지 못했다.

아무도 차지하지 않은 공간에서 새로운 상품으로 승리하는 것은 가능하다. 다른 곳에 이미 존재하는 중개자 밀도를 새로 쌓는 것은 훨씬 어렵다. 중개자 밀도는 기존 활동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법령, 보조금, 사람들이 와 주기를 바라며 지은 건물은 도시로 사업을 끌어올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기존 중심지에서 시장을 빼앗아 오는 일은 드물다.

이전의 사슬

암스테르담, 런던, 뉴욕은 하나의 사슬을 이룬다. 각각의 이전에는 앞선 중심지의 기반 시설에 더해, 앞선 중심지가 따라올 수 없는 특정한 요소 하나가 필요했다.

암스테르담의 금융상품은 당대 최고였다. 약점은 그 뒤에 선 국가의 크기였다. 네덜란드의 공공 신용은 탁월했다. 홀란트주는 17세기에 이자율을 꾸준히 낮춰 가며 막대한 부채를 쌓았는데, 주의 저축이 모든 민간 투자 기회를 넘어설 만큼 불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화국은 훨씬 큰 강대국들 사이에서 무거운 전쟁 부채를 짊어진 작은 나라였고, 암스테르담의 금융기관들은 도시와 VOC의 운명에 묶여 있었다. 1780년 영국과의 전쟁이 터지자 그 얽힘은 치명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1688년 명예혁명 이후의 잉글랜드는 새로운 것을 내놓았다. 의회가 왕실 재정을 통제하는 체제다. 더글러스 노스와 배리 와인개스트는 널리 알려진 대로, 이 덕분에 잉글랜드 국가가 빌린 돈을 갚겠다고 신뢰할 만하게 약속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의회를 장악한 유산계급이 바로 국가에 돈을 빌려준 사람들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부채를 갚을지 말지 표결하는 사람들 속에 그 부채를 가진 사람들이 들어 있었다. 그들의 해석에 따르면 국채 상환은 헌정 구조에 새겨진 이해관계를 통해 저절로 강제되었고, 투자자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1694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한 정부 차입을 조직한다는 명시적 목적으로 특허장을 받은 잉글랜드은행은 이 체제를 제도로 만들었다. 런던의 은행업계는 1725년 약 24개 은행에서 1800년 70개로 늘었다. 잉글랜드의 은행 자산은 1775년 국민소득의 약 15%에서 1825년 30% 가까이로 증가했다.

암스테르담은행의 죽음은 구체적이었고 볼품없었다. 제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동안 비설방크는 전쟁 자금으로 VOC와 암스테르담시에 막대한 금액을 몰래 빌려주었다. 신뢰의 토대였던 지급준비율은 1775~1779년 평균 95%였다가 1783년 37%로 떨어졌다. 은행 자체의 정책 기준으로 보면 1784년에 이미 지급불능 상태였다. 1790년 11월에는 은행화폐가 액면가 밑으로 떨어졌고, 은행은 1820년 공식적으로 청산되었다. 중앙은행 화폐를 개척한 기관은 그 설계가 막으려 했던 바로 그 국가와의 얽힘 때문에 스스로 무너졌다.

런던에서 뉴욕으로의 이동은 더 느렸다. 런던을 쓰러뜨리지 않은 채 서서히 빠져나간 흐름이었다. 19세기 내내 뉴욕은 특유의 미국적 필요를 중심으로 중개자 밀도를 쌓았다. 대륙 규모의 팽창에 대륙 규모로 자금을 대는 일이었다. 1825년 완공된 이리 운하는 뉴욕주 채권으로 비용을 치렀다. 처음에는 이 도시의 저축자들과 신생 저축은행이 이 채권을 샀고, 나중에는 영국을 비롯한 외국 투자자들이 사들여 1829년에는 운하 부채의 약 절반을 보유했다. 돈의 상당 부분은 런던이 댔다. 장기 기반 시설 채권을 발행하고 가격을 매기고 거래하는 장치는 뉴욕이 만들었다. 철도 채권이 뒤를 이었다. 1900년 무렵 뉴욕은 국내 산업 금융을 위한 중개자 집적을 갖추었고, 런던의 도움을 훨씬 덜 받고도 그것을 유지할 만큼 큰 국내 시장을 가졌다. 다만 런던의 신용시장과 금 시장은 여전히 뉴욕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국내 규모를 국제적 기능으로 바꾸어 놓았다. J.P. 모건 앤드 컴퍼니는 영국과 프랑스 정부의 주된 미국 구매 대리인이 되어 약 30억 달러어치의 연합국 조달을 처리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 은행들은 런던이 두 세기 동안 독점해 온 전문성과 거래 상대 관계를 손에 넣었다. 1944년 브레턴우즈는 이 이동을 고착시켰다. 전후 통화 체제를 달러 중심으로 짰고, 그 달러는 공장이 폭격당하지 않은 유일한 주요 산업국의 생산 능력이 받쳐 주었다.

각 중심지는 앞선 중심지가 쌓은 것을 지켰다. 런던은 암스테르담의 영구적이고 거래 가능한 주식을 이어받고 의회의 채권자 보호를 더했다. 뉴욕은 산업적 우위가 뒷받침하는 기축통화를 더했다.

실패한 도시들

함부르크, 빈, 시카고는 저마다 금융 수도에 필요한 것을 상당 부분 갖추고 있었지만,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금융 패권에 이르지 못했다.

함부르크는 안트베르펜을 밀어낸 격변을 견뎌 냈고, 그 상인 일부를 받아들였으며, 16세기 후반과 17세기 내내 교역량을 늘렸다. 현존하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거래소, 자유도시 헌정, 대형 항구를 갖추었고, 17세기 후반에는 명실상부한 세계 시장이자 금융 중심지였다.

함부르크는 안트베르펜과 암스테르담이 쌓은 것을 능숙하게, 그리고 큰 규모로 베꼈다. 함부르크에 없었던 것은 암스테르담에 있던 것, 곧 중개자 밀도가 그 주위로 결정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금융상품이었다. 함부르크는 자기만의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내지 못했고, 암스테르담이, 이어서 런던이 앞서 나갔다.

빈은 수백 년 동안 강대국 제국을 등에 업었고 진정한 국제적 위상을 누렸지만, 유럽 대륙 최대의 경제였던 적은 없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 경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경제의 두 배가 넘었다. 게다가 합스부르크 국가는 금융 체제의 최대 고객이면서 동시에 구조적 약점이었고, 그 재정은 전쟁 비용에 짓눌려 있었다. 급료를 받지 못한 그의 테르시오 부대가 안트베르펜을 파괴했던, 합스부르크 집안의 사촌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네 차례나 채무불이행을 선언했다. 1918년 제국이 해체되자 새 오스트리아 공화국에는 이중제국 인구 5,100만 명 가운데 약 650만 명만 남았다. 빈의 겸업은행들은 그 작은 공화국 안에 남은 산업의 상당 부분을 소유하고 그 기업들에 돈을 빌려주었는데, 이 기업들은 1920년대 내내 끝내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크레디트안슈탈트는 부실 은행들의 최후의 인수자가 되었고, 그들의 부실 산업 대출까지 함께 떠안았다.

시카고는 이 메커니즘이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규제가 닿지 않는 공간을 찾아 그것을 채울 상품을 만들어 낸다면 특정한 새 시장에서는 이길 수 있다. 그런 방식으로 종합적인 금융 패권을 쌓을 수는 없다. CME그룹은 파생상품 공룡이 되었고, 뉴욕은 여전히 주식과 은행업의 중심지다.

오늘의 도전자들

오늘날 허브를 세우려는 실험들은 1558년 함부르크가 둔 수를 변형해 되풀이하고 있다. 아직 그 주위로 시장이 결정을 이루지 않은 상태에서 본격적인 제도 기반을 먼저 짓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들은 그 역사를 안다는 점이다.

취리히는 범위가 더 좁은 경우다. 종합 금융 수도라기보다 프라이빗 뱅킹이라는 한 가지 사업의 중심지다. 스위스는 2025년 홍콩에 근소한 차이로 추월당하기 전까지 세계 최대의 역외 자산 예치 중심지였다. 스위스 은행들은 1914년 이전부터 이미 외국의 재산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 사업을 그토록 오래가게 만든 데에는 두 가지가 더 필요했다. 하나는 의도적인 법적 준비였다. 1934년 연방은행법이 은행 비밀주의를 법으로 굳혔다. 다만 고객 정보의 비밀 유지는 그보다 몇 세기 앞선다(제네바는 1713년 고객 정보 공개를 금지했다). 다른 하나는 아무도 예정하지 않은 우발적 격변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전쟁 중인 대륙 곳곳의 자본을 전쟁에 뛰어들지 않은 몇 안 되는 유럽 국가 가운데 하나로 보냈다. 사방이 전쟁에 둘러싸였지만 침공은 피한 나라였다. 법과 전쟁이 함께 프라이빗 뱅킹의 중개자 밀도를 두텁게 만들었고, 그 밀도는 한 번도 흩어진 적이 없다.

의도적인 정책은 한 도시가 예측할 수 없는 우발적 사건을 받아들일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다. 자리만 잡아서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 그런 준비 없이 도시에 닥친 우발적 사건은 일시적인 기회만 가져올 뿐이고, 그 기회는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

두바이는 의도적 건설을 가장 순수하게 시험하는 사례다. 2004년 출범한 두바이국제금융센터(DIFC)는 자유구역으로, 아랍에미리트(UAE)가 2023년 9%의 연방 법인세를 도입한 뒤에도 적격 기업은 적격 소득에 여전히 0%의 세율을 적용받는다. 2025년부터 시행된 15% 최저한 추가세는 최대 규모의 다국적 기업 그룹에만 적용된다. DIFC는 독립된 자체 법원을 둔 영어 보통법 체계를 갖추었고, 190개가 넘는 UAE의 조세·투자 조약망을 이용할 수 있다. 나와 있는 교본대로라면 두바이는 거의 모든 것을 제대로 했다. 그런데도 두바이에는 여전히 압박 속에서도 스스로 유지되는 중개자 밀도가 없고, 창립의 계기가 될 우발적 사건도 없다.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자본과 전문성을 한곳으로 몰아넣는 격변 말이다. 두바이는 역내 불안이 일 때마다 자본을 얻는다. 하지만 암스테르담과 취리히가 모두 필요로 했던 창립의 사건은 아직 겪지 않았다.

취리히의 패턴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곳은 싱가포르다. 싱가포르는 정치적 안정, 보통법 기반, 아시아태평양에 맞는 시간대, 그리고 특정 상품군(외환 거래, 프라이빗 뱅킹, 무역금융)에서 일찍 확보한 입지를 갖추었다. 이 입지는 하나같이 역내 경쟁이 두꺼워지기 전에 다져졌다. 싱가포르의 역외 달러 시장은 정책의 산물이었다. 1968년 정부가 은행들에 별도의 역외 단위를 운영하도록 허용하고 세제 혜택을 주면서 시작되었다. 싱가포르의 운용자산은 2025년 말 6조 7,000억 싱가포르달러에 이르렀고, 그 76%가 국외에서 왔다. 싱가포르가 이를 설계로 이루었는지, 아니면 냉전기의 불안과 탈식민지화에서 역내 격변에 따른 자본 도피에 이르는 동남아시아의 정치적 격변 덕을 보았는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가장 설계된 것처럼 보이는 사례에는 당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우발적 사건이 녹아 있는 경우가 많다.

홍콩: 헌정적 신뢰의 문제

2025년 스위스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역외 자산 예치 중심지가 된 홍콩은 유일무이한 기회 위에 패권을 쌓았다. 다른 어떤 중심지도 흉내 낼 수 없는 중국 본토 자본시장으로의 접근이다. 그런 점에서 홍콩은 VOC 시대의 암스테르담을 닮았다. 갈 곳이 달리 없었기에 독보적인 상품군이 중개자 밀도를 끌어들이던 시절이다. 홍콩의 보통법 법원은 형식상 독립되어 있고, 기본법이 이를 보장한다. 노스와 와인개스트의 런던 해석에 비추어 보면 빠져 있는 것은 정치적 안전장치, 곧 의원들이 국가의 채권자 가운데 들어 있는 입법부다. 그 해석에 따르면 DIFC가 들여온 잉글랜드 법, 싱가포르의 MAS 체계, 홍콩의 법원은 법적 형식은 재현하지만, 런던에서 처음 그 형식에 신뢰를 부여했던 정치적 장치는 재현하지 못한다. 홍콩의 제도적 독립성이 지금 그 위에 가해지는 압력을 견뎌 낼지는, 역사적 패턴에 비추어 볼 때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변수다.

취리히, 두바이, 싱가포르 가운데 창립의 우발적 사건을 분명히 겪은 곳은 취리히뿐이다. 바로 세계대전이다. 두바이와 싱가포르는 아직 기다리는 중이다. 다만 싱가포르는 이미 그런 사건을 겪고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을 수 있다.

1585년 안트베르펜이 함락된 뒤 몇 해 동안, 그 상인들은 물류 문제를 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거래 상대방, 작동하는 금융상품, 그리고 청산이 이루어지는 시장이 필요했다. 일부는 함부르크로, 일부는 프랑크푸르트로 갔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현실적인 이유로 암스테르담을 골랐다. 가까웠고, 1578년에 개신교로 돌아섰고, 반란군 전선 뒤에서 안전했으며, 많은 이들이 발트해 무역으로 이미 그곳에 연줄이 있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다음 주에 장사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들이 하나의 왕조를 세우고 있다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왕조의 존재는 VOC, 비설방크, 새 거래소처럼 아직 내려지지 않은 결정들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도 필연이 아니었고, 하나하나가 아직 생겨나지도 않은 문제들에 대한 응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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