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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의 마지막 날, 이스라엘 병사들이 보포르성에 국기를 올렸다. 레바논 남부 리타니강 위 절벽에 서 있는 12세기 십자군 요새다.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한 첫날, 골라니 여단은 당시 PLO의 거점이던 바로 이 요새를 습격했다. 이스라엘은 이후 18년 동안 보포르를 차지했고, 1985년부터 이곳은 안보지대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안보지대란 키르야트시모나와 나하리야, 갈릴리 일대 마을들을 로켓 사정권 밖에 두려고 설정한 레바논 남부 점령 지역이다. 전략은 서류상으로는 앞뒤가 맞았다. 위협과 그 위협이 노리는 주민 사이에 물리적 거리를 두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지대는 자신이 억누르려던 조직의 훈련장이 되었다. 사상자가 늘고 여론의 지지가 줄어든 15년이 지난 2000년 5월, 에후드 바라크는 이스라엘군을 철수시켰다. 이스라엘 지도부는 이를 과감한 전략적 결단이라 내세웠고, 비판자들은 도주라고 불렀다. 이스라엘의 대리 민병대이자 점령 지역에서 유일한 통치 파트너였던 남레바논군은 72시간 만에 무너졌다. 지휘관들과 가족들은 남쪽 이스라엘로 달아났고, 전투원들은 진지를 버렸다. 헤즈볼라는 비어 버린 땅으로 걸어 들어갔다. 많은 지역에서 총 한 발 쏘지 않았다. 하산 나스랄라는 안보지대에서 이스라엘군이 물러난 것이야말로 무장 저항이 이스라엘군에게 통한다는 증거라고 선언했다. 이 주장은 이후 26년 동안 헤즈볼라를 규정하는 정치적 간판이 되었다.
이제 이스라엘군이 돌아왔다. 전쟁은 2026년 3월에 재개되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습한 지 이틀 뒤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북부로 로켓을 쏘면서였다. 5월 말까지 이스라엘군은 리타니강을 건넜고, 자흐라니강까지의 땅을 전투 지역으로 선포했으며, 이스라엘군이 자체 공식 역사에서 실패의 기념비로 다루는 그 성을 되찾았다. 25년 넘는 기간 동안 이스라엘이 레바논으로 가장 깊숙이 들어간 진격이었다. 6월 말 미국의 중재로 합의된 틀은 레바논군에 작은 “시범 구역”을 넘기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스라엘의 단계적 철수를 약속한다. 그러나 2026년 10월 현재 이스라엘은 여전히 최대 약 10킬로미터 깊이의 띠 모양 지역을 장악하고 있으며, 헤즈볼라가 무장 해제될 때까지 병력을 주둔시키겠다고 말한다. 내세우는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국경 너머의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 북부 마을들을 지키는 것이다. 상대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2000년 철수가 이 지역에 가르쳐 준 교훈으로 빚어진 25년을 거치며 상대는 훨씬 더 강해졌다.
결정을 내리는 기관이 첫 시도에 무엇을 치렀고 무엇을 얻었는지 알면서도, 같은 군대를 같은 목표를 내걸고 같은 땅으로 다시 이끄는 전략 장치란 대체 어떤 것인가?
원형
1985년에 구상된 안보지대는 비합리적이지 않았다. 1985년 상반기에 레바논 깊숙한 곳의 진지에서 단계적으로 물러난 뒤, 이스라엘은 북부 국경을 따라 스스로 선포한 안보지대를 유지했고, 이를 이스라엘군과 남레바논군이 공동으로 통제했다. 깊이는 최대 약 15킬로미터였고 레바논 국토의 대략 10분의 1을 차지했다. 목적은 헤즈볼라와 로켓 사정권 안에 있는 이스라엘 마을들 사이에 물리적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1985년의 헤즈볼라는 갓 태어난 조직이었다. 1982년 침공에 대한 직접적 대응으로 3년 전에 결성되었고, 이란의 후원을 받았지만 작전 범위는 제한적이었다.
15년 동안 헤즈볼라 전투원들은 익숙한 지형에서 이스라엘군과 싸우는 법을 익혔고, 사상자에 민감한 이스라엘의 성향에 맞춘 소모전 전술을 다듬었으며, 이후 수십 년 동안 이 운동을 규정한 조직 구조와 정치적 신화를 쌓아 올렸다. 전술은 구체적이었다. 이스라엘군 순찰대와 남레바논군 호송대를 노린 도로변 폭탄, 전초기지를 겨냥한 박격포 공격, 뉴스 주기에 맞춘 매복이었다. 헤즈볼라는 군사적으로 이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안보지대의 비용을 이스라엘 대중에게 매주 눈에 보이게 만들기만 하면 되었다. 그 대중은 비용과 편익을 견주어 보고 편익이 모자란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1985년부터 2000년 사이 안보지대에서 이스라엘 병사 약 250명이 전사했다. 남레바논군 대변인은 2000년 3월까지 자군의 전사자를 621명으로 집계했다. 15년에 걸쳐 나뉘어 발생한 이 손실은 군사적으로 파멸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갈수록 적은 시민만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전쟁을 치르는 민주국가에게는 정치적으로 파멸적이었다. 사상자는 큰 전투에서가 아니라 매복과 폭탄 공격으로 꾸준히 흘러나왔다. 몇 주마다 신문에 이름 하나가 실렸다. 헤즈볼라는 정치적 타격은 극대화하면서, 이스라엘 여론을 점령 반대가 아니라 점령 지지로 결집시킬 수도 있는 극적인 폭력은 최소화하는 박자를 찾아낸 것이다.
이것이 메커니즘의 첫 번째 요소였다. 레바논 남부를 가로지르는 활성 전선, 곧 안보지대의 외곽선이 새로운 국경이 되었다. 이 외곽선은 이스라엘로의 침투는 대체로 막았지만 로켓을 사정권 밖에 두기에는 너무 좁았고, 전투원들은 여전히 이를 넘어 안보지대로 들어올 수 있었으며 그 뒤편에서 보급을 받고 조직될 수 있었다. 이 선을 뚫고 들어온 헤즈볼라의 공격 하나하나가 안보지대가 제 기능을 못 한다는 증거였고, 이스라엘의 반격 하나하나는 근원을 없애지 못한 채 개입만 깊게 만들었다. 이스라엘군은 헤즈볼라가 활동하는 곳까지 지대를 넓히지 않고서는 지대 안에서 헤즈볼라를 파괴할 수 없었고, 지대를 넓히면 같은 문제가 더 큰 규모로 생겨날 뿐이었다. 이를 전선 복제라고 부르자. 완충지대를 규정하는 특징인 경계선이, 완충지대가 해결하려던 바로 그 문제를 다시 만들어 낸다.
두 번째 문제는 이 지대를 통치도 해야 했다는 점이다. 남레바논군은 지대 안의 레바논 민간인을 자의적 구금과 집단 처벌, 아이들까지 포함한 강제 징집으로 다스렸고, 이런 조건은 헤즈볼라에 아무런 충성심도 없던 사람들 사이에서 불만을 키웠다. 키암 구금 시설에서 남레바논군이 벌인 행태는 헤즈볼라에 조작할 필요조차 없는 모병 논리를 안겨 주었다. 그곳의 정치범들은 전기 충격, 기둥에 매달기, 조직적 구타를 비롯한 고문을 당했다. 국제적십자위원회는 키암이 문을 연 지 10년 뒤인 1995년까지 이 감옥에 들어갈 수 없었다. 지대가 운영되는 해마다 헤즈볼라를 지지할 잠재적 현지 주민은 늘어났고, 위협을 봉쇄하려고 고안된 장치가 그 위협을 제조하고 있었다.
남레바논군
남레바논군의 병력은 대략 2,500~3,000명이었다. 지휘관 대부분은 기독교도였지만 대원 가운데 기독교도는 절반 정도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시아파·드루즈파·수니파 무슬림이었다. 대원들 바깥에서는 아무런 대중적 정당성도 없었고, 독자적인 병참 능력도 없었다. 이스라엘이 이 조직을 만들고 봉급을 주고 장비를 댔으며, 그 비용은 연간 약 3,500만 달러로 추산된다. 국제앰네스티는 이스라엘 관리들이 적어도 1988년까지 키암에서 신문에 직접 관여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2000년 5월 중순 이스라엘군이 전초기지를 남레바논군에 넘기기 시작하자, 이 민병대는 며칠 만에 허물어졌다. 지휘관들은 가족과 함께 이스라엘로 넘어갔고 전투원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남레바논군 대원과 그 부양가족 약 1,500명, 모두 합쳐 7,000명가량이 이스라엘로 피신했다. 15년 동안 레바논 남부에서 이스라엘 안보 구조의 등뼈 노릇을 했던 이 조직은, 자신을 만든 권력에서 독립된 구조적 지탱력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세 번째 문제는 외교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제425호는 안보지대가 세워지기 7년 전인 1978년에 이미 이스라엘의 레바논 철수를 촉구했다. 이스라엘이 머무는 해가 늘수록, 협상을 통한 해결에 필요한 것과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양보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극이 벌어졌다. 레바논과 더 넓은 국제사회는 결의 제425호 이행 요구를 거둘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주둔 자체가 쟁점이었고, 주둔이 길어질수록 그 요구는 더욱 양보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스라엘 쪽에서는 안보 보장 없는 철수가 해마다 더 굴복처럼 보였고, 점령이 이어지는 해마다 헤즈볼라가 강해지면서 그런 보장을 마련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철수를 제안할 이스라엘 정치 지도자는 장례식이 치러질 때마다 더 답하기 어려워지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지금 떠날 거라면 그 병사들은 무엇을 위해 죽었는가? 1990년대 말에 이르자 여러 해에 걸친 사상자, 제도적 고착, 양측에 쌓인 원한 때문에 1985년에는 닿을 수 있었을지 모를 해결책이 손 닿지 않는 곳으로 멀어져 있었다.
1997년 2월, 안보지대 안의 전초기지로 병사들을 실어 나르던 이스라엘군 수송 헬기 두 대가 충돌해 탑승자 73명 전원이 숨졌다. 이 참사는 여러 해 동안 쌓여 온 흐름에 불을 붙였다. 이스라엘 북부의 네 여성, 라헬 벤도르, 미리 셀라, 로니트 나흐미아스, 자하라 안테비가 ‘네 어머니’ 운동을 창설했고, 이 운동은 안보지대를 방어상의 필요가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는 사상자의 구렁텅이로 다시 규정했다. 바라크는 1년 안에 레바논에서 떠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되었고, 2000년 7월을 시한으로 정했다. 5월에 남레바논군이 붕괴하자 그는 최종 철수를 5월 24일로 앞당겼고, 헤즈볼라는 승리를 선언했다.
15년 동안 안보지대는 로켓 공격을 막지 못했고, 봉쇄하려던 바로 그 조직을 키워 냈다. 마침내 철수가 이루어졌을 때 국경에는 안보지대가 봉쇄하려고 세워졌을 당시보다 더 강한 헤즈볼라가 남았다. 안보지대가 어떤 철수든, 그 결정이 아무리 타당하더라도 패배로 읽힐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대륙 규모
레바논 남부 사례가 이 메커니즘을 가장 작고 가장 정밀한 형태로 보여 준다면, 동유럽의 소련 완충지대는 대략 1,000배 넓은 지역에서 40년에 걸쳐 같은 실험을 벌였고, 구조적으로 같은 결과를 얻었다.
1945년 소련의 안보 논리는 1985년 이스라엘의 논리보다 오히려 더 강했다. 러시아는 한 세대 안에 서쪽으로부터 두 번 침공을 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동맹국에게, 1941년에는 나치 독일에게였고, 길목은 폴란드와 발트 지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 시민 약 2,500만~2,7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 통제 가능한 국가들로 방역선을 두르겠다는 생각은 그 최근의 참혹한 경험에서 끌어낸 결론이었다.
이 방역선은 제 기능을 하려면 소련의 지원이 끊임없이 필요한, 경제적으로 종속된 위성국가들을 낳았다. 한 추산에 따르면 소련은 동유럽의 경제상호원조회의(CMEA) 6개 회원국(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루마니아, 불가리아)에 에너지와 원자재를 국제 가격보다 싸게 팔고 공산품을 국제 가격보다 비싸게 사들이는 방식으로 수십억 달러 규모의 보조금을 주고 있었다. 다른 경제학자들은 이 추산의 방법론과 해석 모두에 이의를 제기하며, CMEA 내부의 가격 책정은 의도적 보조가 아니라 통상적인 블록 경제를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든 완충지대는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비용을 부과했다. 1980년대 말까지 동유럽 전역에 주둔한 수십만 명의 소련군, 군집단 전체를 동원해야 했던 거듭된 군사 개입,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소련의 외교·정보 자원을 집어삼킨 끝없는 정치 관리 부담이었다. 대부분의 완충국은 자립하지 못하고 종속된 채로 남았으며, 소련 통제가 10년 이어질 때마다 경제적 왜곡과 정치적 취약성이 깊어져 완충지대 관리 비용을 높은 수준에 머물게 했다.
전선 복제는 대륙 규모로 작동했다. 완충지대의 서쪽 끝은 나토와 맞닿은 전선이었고, 그 전선에는 소련군이 상시 주둔해야 했다. 단연 가장 큰 병력은 동독에 있었고,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 폴란드에도 수만 명이 더 있었다. 그 전선을 지키려면 주둔군이 필요했고, 주둔군에는 기반 시설이 필요했으며, 그 기반 시설을 유지하려면 정치적 통제가 필요했다.
그리고 저항은 대략 한 세대에 한 번씩 되돌아왔다. 동독, 1953년: 파업 노동자들에 맞서 동베를린 거리에 소련 탱크가 들어섰다. 헝가리, 1956년: 소련의 전면적 군사 개입으로 헝가리인 약 2,500명이 숨지고 약 20만 명이 오스트리아와 유고슬라비아로 피란했다. 체코슬로바키아, 1968년: 프라하의 봄이 바르샤바 조약기구 침공군에 짓밟혔고, 그 과정에서 훗날 브레즈네프 독트린이 된 원칙이 공식적으로 정식화되었다. 폴란드, 1980~1981년: 조합원 1,000만 명의 자유노조 ‘연대’, 그리고 소련의 직접 개입 대신 야루젤스키의 계엄령. 모스크바는 직접 개입의 대가가 너무 크다고 계산했고, 그 계산 자체가 30년간 작동한 메커니즘이 소련의 선택지를 얼마나 옥죄었는지를 드러냈다.
매번의 진압은 완충지대가 설계된 대로 움직인 결과였다. 위성 정권을 권좌에 앉혀 두고 그 나라를 블록 안에 묶어 두는 일이다. 동시에 매번의 진압은 다음 10년의 저항을 지탱할 정치적 자본을 반대 운동에 적립해 주었다. 1953년 동베를린에서 짓밟힌 노동자들은 반체제 운동의 원점이 되었고, 그 기억은 이후 모든 위기에서 다시 떠올랐다. 메커니즘이 마침내 무너졌을 무렵, 완충국 주민들에게는 40년간 쌓인 원한이 있었고, 자신들을 붙잡아 두는 체제에 대한 충성심은 사실상 전무했다.
브레즈네프 독트린
1968년 8월 소련 주도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후, 브레즈네프는 완충지대의 출구 문제를 가장 노골적인 형태로 정식화했다. 사회주의 국가는 사회주의 블록을 떠날 수 없으며, 떠나려는 어떤 시도도 개입을 부른다는 것이었다. 이 독트린은 출구 문제에 이름을 붙였을 뿐 해결하지는 못했다. 출구가 완충지대가 막으려던 모든 것을 풀어헤칠 것이므로 출구는 허용될 수 없다고 선언했을 따름이다. 1989년 고르바초프가 이를 집행하지 않기로 하자 바로 그 일이 일어났다. 공산 정권들은 몇 달 만에, 독트린이 막으려고 고안된 연쇄 붕괴 속에서 무너졌다. 고르바초프가 1988년 12월에 발표한 소련군의 부분 감축은 이미 1989년 봄에 시작되었지만, 완전 철수 합의는 정권들이 무너진 뒤에야 나라별로 협상되었고, 마지막 소련 병사들은 1991년 6월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났다.
1980년대에 이르러 완충국들은 소련이 지키는 자산에서, 유지할 여력도 버릴 여력도 없는 부채로 바뀌어 있었다. 서방의 침공을 막는다는 완충지대 본래의 안보 논리는 이미 수십 년 전에 핵 억지력 때문에 무뎌졌지만, 메커니즘에는 너무 많은 의존과 약속이 쌓여 있어서 이를 해체하는 편이 비용을 계속 치르는 편보다 더 어려웠다. 40년이 지나 마침내 그 균형이 기울었고, 출구는 협상을 통한 타협 대신 붕괴의 형태로 찾아왔다.
진행 중인 실험
레바논 남부와 동유럽은 결말이 이미 붙어 있는 사례다. 이들이 주는 사후적 확신, 곧 당연히 실패할 일이었다는 느낌은 쓸모 있지만 기만적이다. 그것은 메커니즘을 필연처럼 보이게 하고, 그 때문에 가장 중요한 점을 가린다. 결과가 나오기 전에도 메커니즘은 실시간으로 눈에 보인다는 점이다.
2016년 이후 시리아 북부의 튀르키예가 그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 사례는 지금 완충지대 아래의 정치 지형이 움직일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시험하고 있다. 앙카라는 세 차례의 작전으로 완충지대를 쌓았고, 작전마다 지켜야 할 새 전선이 남았다. 그러다 주변의 전쟁이 달라졌다. 2024년 12월 바샤르 알아사드가 몰락했고, 2025년 쿠르드노동자당(PKK)이 해산을 발표했으며, 2026년 8월까지 쿠르드족이 이끄는 시리아민주군(SDF)이 새 시리아군에 편입되었다. 튀르키예군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유프라테스 방패 작전, 2016년 8월~2017년 3월: 튀르키예와 동맹 시리아 파벌들은 유프라테스강 변의 자라블루스에서 서쪽으로 아자즈까지, 남쪽으로 알바브까지 이어지는 지역을 장악했다. 내세운 목표는 국경 지대에서 ISIS를 몰아내고 쿠르드족의 연속된 회랑을 막는 것이었고, 작전은 국지적으로 두 목표를 모두 달성했다. 동시에 인민수비대(YPG)가 장악한 아프린 지역과 맞닿는 새로운 서부 전선도 만들어 냈다.
올리브 가지 작전, 2018년 1월~3월: 튀르키예는 자국 국경에 붙은 쿠르드족 고립 지역 아프린으로 진격했다. 2016년 2월 이곳의 인민수비대 전투원들이 아자즈 쪽으로 밀고 나오자 튀르키예 포대가 이미 포격을 가한 적이 있었다. 앙카라는 아프린 인민수비대를 PKK의 연장으로 규정하고 이 지구를 소탕했다. 작전은 동쪽과 남쪽으로 SDF와 맞닿는 새 경계선을 만들었고, 쿠르드족과 야지디족 주민을 쫓아냈으며, 튀르키예가 후원하는 시리아국민군(SNA) 파벌들을 들여앉혔다. 약탈, 재산 몰수, 시리아 다른 지역 출신 아랍 가족들을 쿠르드족 가옥에 재정착시키는 일을 포함한 이들의 행태는 쿠르드족에게 가장 가혹했지만, SDF에 동조한다는 의심을 받은 아랍인들도 덮쳤다.
평화의 샘 작전, 2019년 10월: 튀르키예는 깊이 30킬로미터의 완충지대를 목표로 탈아비아드와 라스알아인 사이의 띠 모양 지역을 장악했다. 결과는 SDF의 추가 후퇴, 현지 저항의 추가 확대, 그리고 적극적으로 방어해야 할 또 하나의 경계선이었다.
절정기에 튀르키예 통제 지역은 수천 제곱킬로미터에 걸쳐 약 140만 명의 주민을 품고 있었다. 매 작전은 ISIS에 맞서고 국경을 따라 쿠르드족의 자치를 막는다는, 앙카라가 이미 품고 있던 목표를 좇았다. 그리고 튀르키예가 긋는 선마다 한쪽은 안정되었고 다른 쪽은 새로운 경계선이 되었다.
완충지대 안에서는 SNA 파벌들과 헌병대가 자의적 체포와 고문, 강제 실종을 저질렀고, 때로는 튀르키예 관리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쿠르드족의 재산은 약탈당하고 몰수되었으며, 주인이 피란을 떠난 집에 아랍 가족들이 재정착했다. 이 지역의 인구 구성을 의도적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학대의 대부분은 쿠르드족이 감당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점령국인 튀르키예에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학대 하나하나가 지대 밖의 쿠르드족 주도 세력에게는 싸울 이유를 하나 더, 앙카라에는 머물 이유를 하나 더 주었다.
외교의 문은 여러 해 동안 완전히 닫힌 것처럼 보였다. 튀르키예가 내건 철수 조건, 곧 시리아 북부에서 YPG/PKK의 군사 역량을 제거하는 일은 영토를 장악하는 것으로는 이룰 수 없었다. 그러다 완충지대를 둘러싼 정치가 움직였다. PKK는 2025년 5월 해산을 발표했고 그해 7월 무기 파기에 들어갔다. 2026년 1월에는 시리아 정부의 공세가 SDF를 국군과 통합하는 합의로 몰아넣었고, 8월에 SDF 사령관은 통합 완료를 선언했다. 완충지대의 명분이었던 세력은 서류상으로는 독립된 군대로서 사라졌다. 다만 옛 전투원 상당수는 무기를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이제 시리아군 안에서 무기를 들고 있다. 그런데도 튀르키예군은 남아 있고, 앙카라는 자국이 직면한 안보 위협이 제거될 때까지 머물겠다고 말한다. 완충지대가 겨냥했던 세력이 공식적으로 사라졌는데 점령국이 여전히 그 옛 전투원들에게서 위협을 본다면, 그 완충지대는 해체될 수 있는가. 이것이 이 사례가 지금 던지는 시험이다.
튀르키예 통제하의 시리아 북부 통치
튀르키예 작전의 “일시적”이라는 명분은 현장에서 벌어진 일과 잘 맞지 않았다. 튀르키예 리라가 시리아 파운드를 대체했고, 튀르키예 은행과 튀르키예 우체국, 튀르키예 공공 설비가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학교에서는 튀르키예어를 제2언어로 가르쳤다. 쿠르드족과 야지디족 주민은 쫓겨났고, 동구타와 이들리브 등지에서 온 아랍 가족들이 그들의 집에 정착했다. 이 지역은 형식상 주권 영토로 남았지만 사실상 외국의 행정 아래 있었고, 점령국의 체계가 현지 체계를 대체했다. 소련의 완충지대도 똑같이 작동했다. 위성국가들은 명목상 독립국이었지만, 그 경제와 군대, 통치는 모스크바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아사드가 몰락하고 2024년 12월부터 다마스쿠스가 튀르키예의 후원을 받는 파벌들을 새 국방부로 흡수하려 움직인 뒤에도, 튀르키예군은 머물렀고 현장의 삶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메커니즘
세 건설자는 이보다 더 다를 수 없을 정도다. 40년 동안 대륙 규모의 방역선을 지킨 냉전기 핵 초강대국, 15년 동안 레바논 남부의 폭만큼 뻗은 전선을 따라 대리 민병대를 운용한 지역 민주국가, 그리고 내전에 휩싸인 한 국가의 조각난 북부에서 연이어 작전을 벌인 나토 회원국. 세 사례는 시대와 규모, 이념, 상대, 국내 정치가 모두 다르다. 그런데도 이 장치는 셋 모두에서 같은 경로를 밟았고, 이미 끝난 두 완충지대는 모두 건설자를 이전보다 나쁜 처지에 남겨 두었다. 이 닮음은 누가 만들든 완충지대가 작동하는 방식에서 나온다.
메커니즘은 서로 맞물린 세 부분으로 이루어지며, 첫째는 경계선 그 자체다.
새 외곽선은 원래의 국경과 거의 다름없는 전선이 된다. 적은 밀려났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새 선의 건너편에서 다시 조직될 뿐이다. 그러면 점령국 앞에는 세 가지 대응이 놓이고, 셋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실패한다. 확장할 수 있다. 더 긴 외곽선을 지닌 더 큰 지대를 만들어 같은 취약성을 더 큰 비용으로 떠안는 것으로, 튀르키예가 세 번 연속 한 일이다. 고착시킬 수 있다. 여기에는 아무런 전략적 결정도 필요 없다. 철수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때 “일시적”인 것이 기본값으로 변하는 모습이 바로 고착이고, 남레바논군 지대가 15년 대부분 동안 겪은 일이다. 아니면 철수할 수 있다. 점령 자체가 악화시킨 조건에서 원래의 문제를 내주는 것으로, 2000년의 이스라엘과 1989년의 소련이 그렇게 했다.
세 사례 모두에서 고착은 기본 상태였다. 각 지대는 건설자가 확장하거나 떠나기로 할 때까지 그 자리에 눌러앉았다.
둘째는 지대가 낳는 저항이며, 여기서 “일시적”이라는 딱지가 실질적인 역할을 한다. 지대가 공식적으로 일시적이기 때문에 점령국은 그 땅을 노골적으로 통치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지대는 저항을 만들어 내지만, 저항을 진압하는 데 필요한 자원은 결코 투입하지 않는다. 완전한 진압은 완충지대가 아닌 다른 무엇, 곧 정복과 영구 통치를 뜻하게 되기 때문이다.
완전한 진압에 필요했을 것들(레바논을 한 지방으로 통치하는 일, 봉기 때마다 동유럽을 다시 스탈린화하는 일, 쿠르드족 전투원을 만들어 내는 정치적 조건을 없애는 일)은 “일시적 완충지대”를 유지하는 강대국에게 애초에 주어진 선택지가 아니었다. 민주국가는 피점령 주민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거나(이는 점령국의 국내 정치를 바꿔 놓는다), 아니면 자신의 정당성을 무너뜨릴 수준의 진압을 벌이지 않고서는 적대적 영토의 무기한 점령을 좀처럼 지속할 수 없다. 이 명분은 저항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있게 하고, 그것이 계속 주둔할 이유가 되며 철수를 가로막는다.
셋째는 외교의 문이 닫히는 것이다. 완충지대가 일단 생기면, 점령 이전에 가능했던 해결책, 대개 가장 값싼 선택지가 손 닿지 않는 곳으로 멀어진다. 점령국 쪽에서는 안보 세력이 어떤 영토 양보도 굴복으로 취급한다. 철수를 제안하는 정치 지도자는 정치적 반대뿐 아니라 지대를 지키다 전사한 병사들의 가족과도 마주해야 하고, 그 가족들은 자기 자식이 무엇을 위해 죽었느냐고 물을 것이다. 점령당한 쪽에서는 점령이 만들어 낸 원한이 해결의 전제 조건이 되고, 그 전제 조건은 지대가 오래 운영될수록 무거워진다. 해마다 새로운 사상자, 새로운 강제 이주, 그리고 10년 전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었을 조건을 거부할 새로운 이유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결의 제425호는 22년 동안 응답 없이 방치되었다. 브레즈네프 독트린은 21년을 버텼다. 두 경우 모두, 점령 이전에 협상 가능했던 것과 이후에 협상 가능했던 것 사이의 간극은 지대가 끝나기 훨씬 전에 메울 수 없을 만큼 벌어져 있었다.
세 요소는 스스로를 강화하는 순환을 이룬다. 전선 복제는 저항의 물리적 조건을 유지한다. 저항은 지대 자체를 먹고 자라며, 지대는 새로운 전투원과 원한과 조직을 만들어 낸다. 그 저항은 점령국에 머물러야 할 국내적 명분을 준다. 점령국은 언제든 지대가 마주한 위협을 가리키며 철수는 시기상조라는 증거로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머무르는 것은 어떤 해결이든 다뤄야 할 원한 목록에 점령의 세월을 보태면서 외교적 교착을 깊게 한다. 교착은 철수를 가능하게 할 해결을 가로막고, 순환은 다시 시작된다.
순환이 길어질수록 출구는 더 비싸지고, 그만큼 출구는 정치적으로 살아남기 어려운 선택이 되어 순환을 더 늘린다. 이 순환은 레바논 남부에서 15년, 동유럽에서 44년 이어졌다. 시리아 북부에서는 10년째 이어지고 있다. 완충지대가 겨냥했던 세력이 스스로 해산해 시리아군에 녹아든 뒤에도 그렇다.
소진이 일방적 철수를 강요하기 전에 이 순환을 끊으려면 세 조건이 동시에 갖춰져야 한다. 첫째는 지대를 기능적으로 대체할 안보 보장을 제공할 수 있는 상대방이다. 이는 저항 조직이 아니라 제대로 작동하는 국가여야 한다. 지금껏 싸워 온 세력에게 지대를 넘겨 놓고 그것을 해결이라 부를 수는 없다. 둘째는 점령국 안에서 철수 비용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기 전에 그 비용을 떠안을 의지가 있는 국내 정치 세력이다. 누군가는 전사한 병사들이 피로 얻은 것을 내던졌다는 비난을 받아들이고도 선거에서 이겨야 한다. 셋째는 점령 이전의 위협뿐 아니라 점령이 만들어 낸 원한까지 다루는 해결의 틀이다. 피점령 주민에게는 이제 지대가 생기기 전에는 없던 요구 목록이 있고, 그 요구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레바논 남부에서는 여론이 철수 지지로 돌아서고 바라크가 이를 내세워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둘째 조건만 갖춰졌고, 이스라엘은 아무런 해결도, 관리된 이행도 없이 일방적으로 떠났다. 동유럽에서 모스크바는 먼저 완충지대 집행을 멈췄고, 위성 정권들이 무너지기 시작한 뒤에야 자국 군대의 완전 철수를 협상했다.
어떤 변수가 중요한가
2026년의 작전은 되풀이다. 같은 군대가 사실상 같은 땅으로 돌아왔다. 이스라엘군은 리타니강을 넘어섰고, 보포르성을 되찾았으며, 자흐라니강까지의 땅을 전투 지역으로 선포했다. 내세우는 목표도 같다. 국경 너머 로켓 공격의 위협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상대도 같다. 2년간의 전쟁으로 약해졌지만 파괴되지는 않았고, 소모전이 통한다는 확신 위에 쌓인 25년의 조직적 기억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남레바논군은 사라졌고, 그에 상응하는 대리 세력은 없다. 분석가 조 마카론이 5월 말 이스라엘의 진격에 맞서기에는 “지나치게 과부하가 걸려 있다”고 평한 레바논군이 이제 막 대체 세력으로서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2026년 7월 레바논군은 이스라엘군이 비운 첫 번째 작은 “시범 구역”을 넘겨받았다.
2024년 11월 휴전
2024년 11월 말 발효된 휴전은 미국과 프랑스가 발표하고 이스라엘과 레바논이 수용한 것이었다. 레바논은 헤즈볼라와 다른 무장 단체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못하게 막고 리타니강 이남 지역에서 이들을 몰아내기로 약속했다. 이스라엘은 레바논군이 진입해 남부 병력을 1만 명까지 늘려 가는 데 맞춰 60일 안에 단계적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유엔레바논평화유지군(UNIFIL)이 주관하고 프랑스가 참여하는, 미국이 의장을 맡은 감시 기구가 이행 여부를 지켜볼 예정이었다. 이스라엘은 시한을 넘겼고, 헤즈볼라의 활동이 계속된다는 이유로 레바논 안의 언덕 위 진지 다섯 곳을 유지했다. 라부네, 자발 블라트, 아이타룬 인근의 잘알데이르, 마르카바–훌라, 키암 인근의 하마메스다. UNIFIL은 휴전 첫해에만 이스라엘의 공중·지상 위반을 1만 건 넘게 집계했다.
휴전은 2026년 3월 2일 무너졌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이후 헤즈볼라가 이스라엘로 로켓을 쏜 날이다. 미국이 중재한 두 번째 적대 행위 중단이 4월 중순 시작되어 두 차례 연장되었지만, 이스라엘군은 계속 진격해 5월 말 리타니강을 건넜다. 6월 말 합의된 틀이 마침내 이스라엘의 철수를 레바논군 배치와 헤즈볼라 무장 해제에 연계했고, 그 첫 단계는 작은 시범 구역들이었다. 헤즈볼라는 이를 거부하고, 이스라엘은 헤즈볼라가 무장 해제될 때까지 병력을 주둔시키겠다고 말한다. 정치적 출구의 설계도는 서류상으로는 존재한다. 지금까지 그것은 한 번에 마을 하나씩 움직였다.
2026년이 2000년을 되풀이할지는 세 가지 질문이 가른다. 첫째는 내세운 군사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느냐다.
1985~2000년의 안보지대는 로켓 공격을 막지 못했다. 점령 기간에 헤즈볼라의 사정거리는 오히려 늘었다. 1980년대 중반 국경 마을에 겨우 닿던 로켓이 2006년 전쟁 무렵에는 하이파까지 닿았다. 안보지대는 헤즈볼라에 작전 경험과 정치적 정당성을 안겨 주었고, 그것이 헤즈볼라를 민병대에서 지역 군사 강국으로 탈바꿈시켰다. 헤즈볼라가 레바논 남부에서 발사할 수 없는 조건을 만든다는 현재의 목표는 영토 통제를 통해 단기적으로는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헤즈볼라를 조직으로서 파괴하거나(2006년 전쟁과 2024~2026년 분쟁을 포함한 26년간의 작전도 이루지 못한 일이다), 헤즈볼라의 작전상 존재 이유를 없애고 그 지지층에 무장 해제를 받아들일 이유를 주는 정치적 해결에 이르지 않는 한 그렇다. 1985~2000년의 지대는 그런 목표를 스스로 이룬 적이 없고, 그것을 이룰 수 있었을지 모를 해결은 지대가 오래 버틸수록 더 멀어졌다.
둘째는 소진에 기대지 않는 정치적 출구 조건이 존재하느냐다. 2000년의 철수를 이끈 것은 주로 국내 압력, 무엇보다 레바논에서 복무하는 병사들의 부모가 세운 ‘네 어머니’ 운동의 압력이었다. 바라크는 철수를 시리아와의 협상 타결에 엮으려 했지만, 그 협상이 2000년 3월 결렬되자 일방적으로 떠났다. 레바논과의 해결도, 헤즈볼라의 무장 해제도, 철수를 전략적으로 지속 가능하게 할 정치적 틀도 없었다. 2024년 11월 휴전과 이를 토대로 한 2026년 6월의 틀에는 레바논군 배치와 헤즈볼라 무장 해제 조항이 들어 있고, 이는 적어도 정치적 출구의 설계도에 해당한다. 레바논군이 이를 이행할 수 있느냐가 핵심 질문이며, 현재의 공세는 그 답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셋째는 상대방이다. 2000년에는 상대방이 존재하지 않았다. 헤즈볼라가 남부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는 레바논 기관도, 그런 시도를 할 만큼 강력한 권한을 지닌 국제 병력도 없었다. 2026년에는 레바논군이 존재하지만 돈과 장비가 모자라고, 수십 년 동안 남부 배치를 제약해 온 바로 그 종파 역학에 묶여 있다. 레바논의 모든 국가 기관이 그렇듯 군의 장교단은 종파별로 안배되어 있다. 군 예산은 레바논의 경제 붕괴로 쪼그라들었다. 베이루트의 정치 지도부는 남부에서 군의 역할이 헤즈볼라를 대체하는 것인지 헤즈볼라와 공존하는 것인지를 한 번도 완전히 정리하지 못했다. 2000년과 달리, 상대방이 존재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7월 레바논군은 이스라엘군이 비운 첫 시범 구역 마을인 자우타르알가르비예로 진입했다. 이로써 2026년에는 1985~2000년의 지대에는 없었던 길이 생겼다. 그 첫걸음이 실제 인계로 이어질지는, 이스라엘의 작전이 헤즈볼라 이후에 올 무엇에게든 새로운 세대의 원한을 만들어 내기 전에 레바논 국가가 진정한 안보 파트너로서 행동할 역량과 정치적 의지를 다질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보포르성을 되찾은 군대는 첫 번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으로 알고 있다. 18년의 세월, 안보지대에서 전사한 약 250명의 병사, 남레바논군의 붕괴, 나스랄라의 선언, 그리고 그 선언이 이 지역의 전략적 가정을 빚어 온 20년.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병력이 새로운 안보지대의 일부로서 그곳에 머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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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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