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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폐허에서 반도체 초강대국으로,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문화 수출국으로, 그리고 이제는 인구 감소가 불러온 경제적 압박에 직면한 사회로. 한국이 어떻게 현대사에서 가장 눈부신 발전 궤적 가운데 하나를 그려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폐허
1961년 3월, 정전 후 8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 뉴욕타임스 특파원 A.M. 로젠탈은 한국에 관한 연재 기사를 마무리하며, 당시 진지한 관찰자라면 거의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을 판정을 내렸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에서도 더 가난한 반쪽, 즉 ‘너무 많은 인구와 너무 적은 자원’으로 살아남으려 애쓰며 당분간 미국 원조에 기댈 수밖에 없는 나라를 묘사했다. 기사 제목은 ‘한국의 앞날은 암울하다’였다. 자극적인 제목이 아니었다. 정확한 제목이었다.
그보다 8년 전인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전투는 멈췄지만 참화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고착됐다. 서울을 네 차례나 폐허로 만들고, 공업 지대인 북부를 초토화하고, 여러 도(道)에서 주민을 통째로 사라지게 한 이 전쟁에서 한반도 전쟁 전 인구의 약 10분의 1에 해당하는 3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된다. 1953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약 67달러였다. 경제경영연구소(CEBR)는 2023년 분석에서 당시 한국의 1인당 GDP가 소말리아와 아이티보다도 낮았다고 단언했다. 이 나라는 그저 가난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진지한 경제 관찰자 대부분이 보기에 빠져나갈 출구가 없어 보이는 종류의 가난이었다.
구조적 상황은 명백했다. 한반도의 산업 기반, 즉 광산과 화학공장, 수력발전 시설, 중공업 설비는 거의 전부 38선 이북, 북한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다. 남한은 농업 중심에 인구가 조밀하고 자원은 빈약했다. 서울의 이승만 정부는 운영 예산의 대부분을 미국 원조에 의존했다. 1946년부터 1976년까지 미국은 한국에 126억 달러의 경제 원조를 제공했는데, 마이클 세스가 2013년 아시아학회에 기고한 회고 글에서 지적했듯 이는 미국이 아프리카 전체에 제공한 원조 총액의 두 배 가까이 되고 라틴아메리카 전체에 제공한 원조 총액에 육박하는 액수였다. 이것은 개발이 아니었다. 생명 유지 장치였다.
게다가 원조는 상황을 거의 바꾸지 못했다. 1953~1961년 성장률은 연평균 4% 안팎이었고, 급증하는 출생률을 감안한 1인당 기준으로는 2%에도 못 미쳤다. 전미경제연구소(NBER)의 기념비적 연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의 경제성장’에 따르면 1956~1958년 미국 원조 자금으로 조달한 수입이 전체 수입의 80%를 넘었다. 주로 광산물과 수산물이던 수출은 GNP의 1~2.4%에 불과했다. 이 나라는 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원조를 소비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부패는 실패를 더욱 악화시켰다. 당대와 후대의 여러 자료에 따르면 산업 기반 구축을 위해 들어온 미국의 원조는 상당 부분 사적 축재로 빼돌려졌다.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로 이승만이 하와이로 망명한 1960년에도 한국이 나아갈 길은 1953년과 마찬가지로 불투명했다. 뉴욕타임스의 평가는 선견지명처럼 보였다.
| 측정의 문제: 한국은 정말 ‘케냐보다 가난’했나 개발경제학계에서는 1960년 한국의 1인당 소득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는 주장이 회자돼 왔다. 그러나 데이터는 좀 더 복잡한 사정을 보여준다. 1960년 한국의 저조한 수치는 불과 7년 전에 끝난 참혹한 전쟁의 직접적 여파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 전쟁은 자본을 파괴하고 주민을 대거 떠돌게 했으며, 측정된 산출을 생산 잠재력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1953~1961년은 경제사가 없는 나라의 출발점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파괴된 경제의 회복기로 읽어야 한다. 한국에는 정교한 행정 기반과 (수용 능력은 제한적이었지만) 거의 보편적인 교육 수요, 그리고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인구가 있었다. 이를테면 1960년의 케냐와는 매우 다른 조건이었다. 이 비교는 하나의 데이터로서는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동등한 발전 잠재력에 관한 진술로서는 오해를 낳는다. |
장군과 계획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군은 군사정변을 일으켜 짧고 혼란스러웠던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군사정권을 세웠다. 당시 마흔세 살이던 그는 작은 체구에 강렬한 기질을 지닌 인물로, 일제강점기 일본이 세운 만주국 군대의 하급 장교로 복무했으며, 훗날 스스로 밝혔듯 메이지 유신의 국가 주도 산업화 모델을 깊이 동경하게 됐다. 그가 집권했을 때 한국의 1인당 소득은 약 94달러였다. 북한은 그보다 높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행한 첫 연설에서 박정희는 이후 거듭 되풀이하게 될 한 구절을 남겼다. 나라가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권력을 장악한 지 몇 주 만에 박정희는 군 장교가 아닌 민간 테크노크라트들로 경제기획원을 꾸리고, 생존 경제에서 산업 경제로 가는 길을 설계하는 임무를 맡겼다. 1962년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그 토대를 놓았다. 계획은 경공업, 농업 근대화, 사회기반시설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그해 울산을 ‘특정공업지구’로 지정하면서 박정희가 언급했듯, 남한에는 이렇다 할 산업 전통이 없었다. 계획의 목표는 연평균 GDP 성장률 7% 안팎이었다. 실제로는 5년간 평균 7.8%를 달성했고, 그동안 1인당 GNP는 83달러에서 125달러로 늘었다.

박정희가 이 과정을 가속하기 위해 택한 수단은 재벌이었다. 재벌은 그가 군 복무 시절 지켜본 일본의 자이바쓰를 느슨하게 본뜬 대규모 가족 소유 기업집단이었다. 국가가 통제하는 은행 부문은 시장금리보다 낮은 금리의 보증 대출을 통해 이들 그룹에 자본을 몰아주라는 지시를 받았다. 성과 할당량이 정해졌다. 수출 목표를 달성한 기업은 추가 신용과 세제 혜택, 손쉬운 인허가, 보조금을 받았다. 목표에 미달한 기업은 그 대가를 치렀다. 비판자와 옹호자 모두 때때로 지나치게 단순화해 왔지만, 이 체제는 부패냐 순수한 개발 계획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시에 둘 다였으며, 훗날 경제학자들이 ‘발전적 차별’이라 부르게 될 경제적 성과 중심의 능력주의로 짜여 있었다.
섬유 산업으로의 전환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61년 한국의 수출 총액은 약 4,100만 달러였고, 섬유·의류는 그중 가장 큰 품목군에 속했다. 제1차 계획 기간인 1965년에는 총수출이 1억 7,500만 달러로 늘었고, 섬유가 가장 큰 품목이었다. 1954년 삼성의 이병철이 세운 제일모직(이병철은 군사정권이 1961년 공개적으로 부정축재 혐의를 제기했다가 이후 용서하고 동원한 바로 그 인물이다)은 성장하던 삼성그룹의 한 축이 됐다. 강압과 건설은 나란히 진행됐다.
제2차 5개년 계획(1967~1971)은 이후 20년을 규정할 전략적 전환의 토대를 놓았다. 제3차 계획 초기인 1973년 1월, 박정희는 철강, 석유화학, 조선, 기계, 전자를 아우르는 중화학공업화 추진을 선언했다. 이들 산업 어느 분야에서도 검증된 경험이 없던 나라로서는 엄청난 도박이었다. 1970년 6월, 해양 분야 경험이 전혀 없던 토목업체 현대건설은 울산에 조선소를 짓겠다고 신청해 정부 승인을 받았다. 1970년대 중반 현대는 울산에 100만 톤급 드라이독을 건설해 초대형 유조선을 건조하고 있었다. 회사는 자동차, 화학, 시멘트, 전자로 사업을 넓혔다. 1975년 내놓은 포니는 이탈리아의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디자인하고 미쓰비시의 엔진과 구동계를 바탕으로 만든, 한국 최초의 양산형 고유 모델 자동차였다. 이것은 자생적인 기업가 정신이 아니었다. 정부의 명시적 지시 아래 민간 사업자를 통해 발휘된 국가 역량이었다.
| 포항제철이라는 도박 1968년 박정희 정부는 한국 남동부 해안의 포항에 일관제철소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세계은행은 한국이 그런 시설을 운영할 기술 역량과 경영 역량, 시장 여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해 자금 지원을 거부했다. 박정희는 개의치 않고 밀어붙였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조약(국내 반발이 워낙 거세 1964년 협상 반대 시위가 계엄령으로 진압됐을 정도의 조약이었다)으로 확보한 대일 청구권 자금을 투입해 오늘날 포스코로 알려진 포항종합제철을 세운 것이다. 1973년 포항제철소가 가동에 들어갔다. 1980년대에 이르러 포스코는 세계에서 원가 효율이 가장 높은 철강업체 중 하나가 됐다. 세계은행은 훗날 포항 프로젝트를 자신들의 개발 모델이 지닌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 연구로 인용했다. 한국의 계획 입안자들이 얻은 교훈은 더 단순했다. 때로는 테크노크라트가 틀리고 독재자가 옳다는 것이다. |
수치
1962년부터 1990년 사이에 일어난 일의 규모는 현대 경제사에서 견줄 만한 사례가 거의 없다. 아래 표는 세계은행, OECD, 한국은행의 데이터와 동료 심사를 거친 여러 경제 분석을 토대로 그 변화를 정리한 것이다.
| 지표 | 1962 | 1980 | 1989 | 1996 |
| 1인당 GDP(명목, 달러) | $106 | $1,746 | $5,989 | $13,865 |
| GDP(명목, 10억 달러) | $2.3 | ~$63 | $204 | ~$520 |
| GNP 대비 제조업 비중 | 14.3% | ~28% | 30.3% | ~31% |
| GNP 대비 국내저축 | 3.3% | ~23% | 35.8% | ~35% |
| 교역 규모(10억 달러) | $0.48 | ~$39 | ~$128 | ~$280 |
| 연평균 실질 GDP 성장률 | — | — | 8%+ | 7.8% |
이 수치는 흔한 개발경제학 통계의 범주를 넘어선다. 비슷한 규모의 경제가 비슷한 기간에 기록한 생산성 수치 가운데 가장 극적인 축에 속한다. 한국의 실질 GDP는 30년 가까이 연평균 8% 넘게 성장했다. 제조업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배 넘게 커졌다. 1962년 3.3%로 자국 투자조차 감당하기 힘들 만큼 낮았던 국내저축률은 1989년 35.8%로 올라섰고, 이로써 한국은 원조와 해외 차입에 의존하던 자본 수입국에서 스스로 투자 자본을 만들어내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상품 교역 규모는 260배 이상 늘었다.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했나? 경제학자들은 이 질문을 두고 끝없이 논쟁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는데, 그 자체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실증 연구에서 가장 일관되게 꼽히는 요인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 정부의 수입대체 모델을 대체한 대외지향적 수출 전략, 교육받은 노동력의 동원(이승만 정부의 교육 투자 덕분에 1960년 중등학교 학령인구의 29%가 학교에 다녔고, 이 비율은 이후 20년 동안 90% 이상으로 높아졌다), 수출 목표 달성을 조건으로 재벌 그룹에 신용을 배분한 전략적 정책금융, 그렇지 않았다면 써야 했을 만큼의 국방비를 한국이 쓰지 않아도 되게 해준 미국의 안보 공약, 1965년 이후 일본의 기술 이전과 청구권 자금, 그리고 한국군 베트남 파병이 가져다준 수입과 시장 접근이다. 약 30만 명의 한국 군인이 베트남에서 복무했고, 그 대가로 한국이 받은 미국의 지급금과 계약은 1965~1972년 총 10억 달러 안팎에 이르렀다.
박정희가 1970년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이 논리를 농촌으로 확장했다. 새마을운동은 경쟁 방식의 매칭 지원금을 통해 마을 공동체를 동원해 길을 닦고, 주거를 개선하고, 협동 경제활동을 일구게 했다. 개발 기준을 충족한 마을은 추가 자원을 받았다. 이 운동은 효과적인 농촌 개발 사업이자 동시에 정치적 통제 수단이었고, 역사학자들은 어느 쪽이 본질이었는지를 두고 의견이 갈린다. 경제 데이터는 운동이 효과를 거뒀음을 시사한다. 1960년대 내내 벌어지던 도농 소득 격차는 1970년대 들어 좁혀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농촌은 국가 산업경제에 상당 부분 편입됐다.
엇갈린 길: 두 개의 한국
한국이 결국 거둔 성공의 규모에 가려 대체로 잊힌 사실이 있다. 분단 이후 30년 가까이 한반도에서 더 잘살던 쪽은 북한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사소한 역사적 각주가 아니다. 1961년 박정희가 실제로 무엇을 시도했는지, 그가 무엇을 기준으로 자신을 견주었는지, 그리고 그의 성공이 이를 지켜본 사람들에게 왜 그토록 뜻밖이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사실이다.
1960년대 이전 북한의 1인당 GDP는 남한보다 훨씬 높았다(추정치는 30~50% 높았다는 것부터 두 배가 넘었다는 것까지 다양하다). 이는 일본이 식민지에서 벌인 산업 개발의 지리적 배치를 반영한 구조적 우위였다. 화학공장, 수력발전 댐, 광산, 제철소 등 일본의 전전(戰前) 중공업 투자는 38선 이북, 훗날 북한 정권이 들어선 지역에 집중돼 있었다. 1945년 일본이 물러가고 1948년 분단이 굳어지자 남쪽에 남은 것은 논과 어촌이었다. 1960년 북한의 1인당 GDP는 177달러, 남한은 79달러로 추정된다. 세계은행 데이터에 따르면 1963년 한국의 1인당 GDP는 약 147달러로 가나(205달러)보다 낮았고 인도(103달러)보다 40%가량 높은 수준에 그쳤다.

학술지 ‘오스트레일리아 경제사 리뷰(Australian Economic History Review)’에 실린 김두얼(2021)의 동료 심사 역사 분석은 이 역전을 확인하며 교차점을 1970년대로 보았다. 널리 인용되는 한 추정치(기미야·다카하라, 2024)에 따르면 1974년 한국의 1인당 GDP는 569달러로 북한의 추정치 520달러를 앞질렀고, 이후 남한은 다시는 뒤처지지 않았다. 이 변곡점 이후 국가 주도의 수출지향 자본주의와 주체사상에 입각한 자력갱생 및 명령식 배분이라는 두 궤적은 놀라운 속도로 벌어졌다. 2006년 북한의 1인당 소득은 약 1,108달러로 남한의 17분의 1 수준으로 추정됐다. 2023년에는 유엔이 추정한 북한의 1인당 640달러와 한국의 3만 5,538달러 사이에 유엔 수치 기준으로 약 56배 차이가 났다.
북한의 궤적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제적 비극이다. 정점기에 북한 GDP의 60%가 넘는 규모였던 소련의 보조금 에너지 수입은 근간인 주체 모델이 정체하는 동안에도 1970~1980년대 내내 경제를 지탱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보조금도 끊겼다. 농기계와 비료가 바닥나면서 농업 생산이 무너졌다. ‘고난의 행군’으로 알려진 1994~1998년 대기근으로 추정치에 따라 24만 명에서 350만 명이 숨졌다. 한국은행 추산에 따르면 2012년 북한 경제 규모는 1992년보다 작았다. 1970년대 북한은 소련에 기관차를, 아프리카에 농기계를, 중국에 합성섬유를 수출했다. 2000년대 초에 이르러 북한의 주요 수출품은 무기, 마약, 위조지폐가 됐다.
남북 비교는 개발경제학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두 국가는 한반도 전체가 공유한 같은 역사적 유산에서 출발했고, 같은 언어와 상당 부분 같은 근대 사회사를 공유했지만, 서로 다른 정치경제 체제와 대외 노선 아래 극명하게 갈라졌다. 그 결과는 20세기 개발사에서 가장 선명한 비교 사례 가운데 하나다. 1인당 약 640달러와 3만 6,000달러라는 격차는 지리나 문화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상당 부분 제도와 전략, 외부 지원, 그리고 두 국가가 개방과 안보, 산업화를 관리한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이 빚어낸 격차다.

| 주체의 역설: 자력갱생은 왜 실패했나 김일성의 주체사상, 즉 경제·정치·군사 전 영역에 걸친 민족 자립의 교리는 20세기 한반도가 겪은 식민지 종속의 역사에 대한 대응으로서는 이론적으로 일관성이 있었다. 그 실패는 이념이 아니라 구조에서 비롯됐다. 주체사상은 생산성을 희생해 정치적 생존을 극대화했다. 농업 집단화, GDP의 약 25%를 잡아먹은 군사비, 기술 이전으로부터의 고립, 교육 체계에서 실용적 기술을 대신한 사상 교육이 한데 겹치면서 산업 발전에 필요한 피드백 고리가 작동할 수 없는 경제가 만들어졌다. 박정희 모델과의 대비는 시사적이다. 박정희 역시 국가 안보와 정치적 통제를 최우선에 두었지만, 안보를 위해 성장을 희생하는 대신 경제성장을 통해 안보와 통제의 비용을 충당하는 길을 택했다. 취약성에 개방으로 대응하느냐 폐쇄로 대응하느냐의 선택이 전후 세계에서 가장 극적인 발전 격차를 낳았다. |
속도의 대가
장면 총리가 1961년 신년사에서 서독의 전후 부흥을 본보기로 내세운 데서 유래한 ‘한강의 기적’은 실재했다. 그 대가 역시 실재했다. 변화의 속도는 부분적으로, 민주 사회라면 평시에 좀처럼 용인하지 않을 수단을 통해 얻어진 것이었다.
노동권은 체계적으로 억압됐다. 독립 노조는 해산됐다. 파업은 금지됐다. 1965~1979년 실질임금은 오르기는 했지만 생산성 향상에 크게 뒤처졌다. 마산 수출자유지역 공장의 노동자들, 현대 울산 단지의 조립 라인, 구로공단의 방직 공장은 산업 확장의 재원이 된 수출 흑자를 만들어냈지만 그 과실은 가져가지 못했다. 1960~1970년대 한국의 지니계수는 소득 수준이 비슷한 경제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낮았다. 소득 분배는 억눌려 있었지만 극심하게 불평등하지는 않았다. 억압된 것은 분배 자체가 아니라 분배 조건을 협상할 정치적 역량이었다.
정치적 탄압은 체계적이었다. 박정희의 조카사위이자 군사정변을 함께 모의한 김종필이 창설한 중앙정보부는 내부 통제의 도구였다. 반체제 인사들은 투옥됐다. 언론은 검열당했다. 1972년 유신헌법은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박정희에게 무기한의 집권을 보장했다. 1975년 발령된 긴급조치 9호는 헌법 비판 자체를 범죄로 규정했다. 풍자시 ‘오적’으로 이미 투옥된 적이 있던 시인 김지하는 1974년 학생들의 반정부 음모를 배후에서 지원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국제적 압력 속에 감형됐다. 박정희의 통치는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만찬 자리에서 그를 쏘면서 막을 내렸다. 김재규는 갈수록 심해지는 정권의 탄압에 반대해 거사를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1979년 12월 쿠데타와 1980년 5월의 전권 장악을 통한 전두환 장군의 권력 승계, 그리고 같은 달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그의 폭력적 진압은 같은 기록에서 지울 수 없는 일부다. 이 진압으로 공수부대에 목숨을 잃은 민주화 시위대의 수는 지금도 논란이 있지만 150명을 넘는 것은 분명하다.
재벌 자신도 이 시기에 한 세대 안에 파국으로 이어질 구조적 부담을 쌓았다. 정부 지원이 보장되자 재벌은 무분별하게 돈을 빌렸다. 1990년대 중반 최대 그룹들의 부채비율은 400%를 넘었다. ‘대마불사’라는 가정이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 자체에 새겨져 있었다. 후버연구소가 외환위기 이후 분석에서 지적했듯, 정부가 ‘감히 큰 말을 죽게 내버려 두지는 못할 것’이라는 믿음은 비공식적 통념이 아니라 관찰된 행태에서 끌어낸 합리적 추론이었다. 기아, 한보, 삼미, 진로, 그리고 마침내 대우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이 가정을 시험하게 된다. 그 가정은 대부분의 경우 깨졌다.
|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민주화 이행 민주주의가 포퓰리즘적 임금 인상과 투자 차질을 불러 발전을 탈선시킬 것이라는 권위주의의 경제적 논리는 박정희와 그 후계자들에 의해 나름 정교하게 개진돼 왔다. 수백만 명의 시민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1987년 6월 항쟁은 이 명제를 시험대에 올렸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군이 광주를 되풀이하기를 꺼리는 상황에 직면한 집권 여당 대표이자 직접 낙점된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뒤이은 민주화는 경제성장을 탈선시키지 않았다. 1990년대에도 성장세는 이어졌고, 서울올림픽은 한국의 근대성을 세계에 알렸으며, 노동권은 비슷한 OECD 경제들보다 여전히 약했지만 더 이상 처벌의 대상이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성장을 희생시킨다’는 명제는 적어도 한국의 경우 반증됐다. |
교육 국가
교육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서는 한국 경제 발전에 관한 어떤 설명도 완전할 수 없다. 여기서 교육은 배경 조건이 아니라, 국가가 지속적으로 관리해 온 핵심 정책 수단이다. 그리고 이 수단은 한국의 가장 큰 경쟁 우위와 가장 심각한 사회 병리 가운데 일부를 동시에 낳았다.
역설적이게도 그 토대를 놓은 것은 다른 거의 모든 면에서 실패한 이승만 정부였다. 정전 후 10년 동안 한국은 이례적으로 폭넓고 비교적 균일한 공립학교 체계를 구축했다. 정부는 도시 학교에 버금가는 수준을 유지하겠다는 분명한 의도로 원조와 자원을 농촌 학교에 배정했다. 수백 년 동안 유교적 학문 성취가 신분 상승과 관직 진출의 주된 통로였던 문화적 유산에 이끌린 부모들은 국가가 공급할 수 있는 속도보다 빠르게 교육을 요구했다. 1960년 중등학교 학령인구의 29%가 학교에 다녔고, 1980년대 초에는 이 비율이 90%를 넘어섰다. 박정희가 5개년 계획에 착수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 바로 이렇게 교육받은 노동력이었다.
박정희는 이 투자를 체계적으로 심화했다. 제3차 5개년 계획의 중화학공업화 추진에는 기존 체계로는 길러낼 수 없는 규모의 엔지니어와 기술 인력이 필요했고, 정부는 대학 체계와 함께 기술·직업 교육을 확대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한국은 OECD 기준에 맞먹고 일부 분야에서는 이를 웃도는 비율로 공학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었다. 재벌은 이들을 양성 경로에서 곧바로 흡수했고, 표준화된 국가 교육과정과 경쟁 시험, 위계적 학력 체계로 이뤄진 이 양성 경로의 설계 자체가 재벌의 인력 수요를 염두에 두고 함께 짜인 것이었다. 교육은 산업정책과 별개가 아니었다. 산업정책의 한 구성 요소였다.
그러나 한국의 산업 인력을 길러낸 이 체계는 그 과정에서 교육 군비 경쟁도 낳았고, 이 경쟁은 1990년대 이후 박정희가 의도한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무언가로 치달았다. 이 경쟁의 도구는 학원이다. 전국에 수만 곳에 이르는 사설 입시학원으로, 학생들은 정규 수업이 끝난 뒤 때로는 밤 10시 넘어서까지 이곳에 다닌다. 학원 산업은 1960년대 공교육의 소박한 보완재로 출발했으며, 1990년대 들어 민주화와 가처분소득 증가, 그리고 1997년 이후 노동시장에 대한 불안 확산을 계기로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79년 학원에 다닌 학령기 학생은 약 6%로 추산된다. 1997년에는 59%, 2008년에는 75%였다. 2023년 기준 한국 초·중·고등학생의 80% 가까이가 어떤 형태로든 사교육을 받고 있었다.
이 체계의 재정적 규모는 국제적으로 비교해도 이례적이다. 2024년 한국 가계가 학령기 자녀의 사교육에 쓴 돈은 29조 2,000억 원(약 210억 달러)으로, 10년 전보다 60% 늘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5년 말 자녀가 둘 이상인 가구는 자녀 교육비로 월평균 61만 1,000원을 지출했는데, 이는 가계 소비지출의 12.6%로 식비 다음으로 큰 비중이다. 학술지 ‘경제발전과 문화변동(Economic Development and Cultural Change)’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초·중·고 학생 사교육에 대한 가계 지출은 2006년 GDP의 약 2.57%에 달했다. 학술지 ‘옥스퍼드 교육 리뷰(Oxford Review of Education)’에 실린 동료 심사 분석은 2008년 이 수치를 GDP의 3%로 추산했다. 여러 지표로 볼 때 한국은 세계에서 아이를 키우는 데 돈이 가장 많이 드는 나라가 됐다. 매년 11월 치러지며 대학 입학을 결정하는 8시간짜리 시험인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대한 날이어서, 듣기 평가 시간에는 소음을 줄이기 위해 항공기 운항 경로까지 조정된다.

이 투자의 성과는 측정 가능하다. 한국은 25~34세 인구 중 고등교육 이수자 비율이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70%를 넘어 미국보다 20%포인트 이상 높다. 한국의 15세 학생들은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의 수학·읽기·과학 영역에서 꾸준히 세계 최상위권에 든다. 삼성과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엔지니어, 현대의 디자인팀, 한류 콘텐츠 산업의 설계자들은 상당 부분 이 체계의 산물이다.
그러나 OECD의 한국 교육 체계 분석은 총점이 가리고 있는 구조적 역설을 지적한다. 한국 청년층의 대졸자 비율은 OECD 최고 수준이지만 고용률은 상대적으로 낮다. 2021년 고등교육을 받은 25~34세 한국인의 고용률은 남성 약 80%, 여성 약 73%로, OECD 평균인 88%와 82%에 못 미쳤다. 등록금과 포기한 소득을 감안하면 한국에서 고등교육의 재정적 수익률은 OECD 최저 수준이며, 상당수 졸업생에게는 마이너스다. 체계 전체가 그 획득을 목표로 짜여 있는 학위라는 자격은 경쟁 속에 값이 치솟아, 이제는 그 비용을 확실히 회수해 주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2022년 한국인은 사교육에 26조 원(약 200억 달러)을 썼다. CNN은 이 금액이 아이티의 GDP 전체와 맞먹는다고 지적했다.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은 2024년 말 13억 원(96만 달러)을 넘어 가구 연소득 중위값의 13배를 웃돌았다. 사교육비만으로도 한국 평균 가구 소득의 약 10%가 들어간다. 이런 비용은 감당할 여력이 가장 적은 가정에 가장 무겁게 떨어지며, 동시에 출산 결정을 짓누른다. 조사 때마다 교육비는 한국인들이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하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입시 경쟁에서 개별 자녀에게 우위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학원 체계는 모든 가정이 그저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 더 빨리 달려야 하는 집단적 함정이 됐고, 그 총체적 결과로 수백만 한국인에게 가정을 꾸리는 일 자체가 경제적으로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 됐다.
| 수능, 그리고 불안의 교육과정 매년 11월이면 한국은 사실상 멈춰 선다. 수능 날에는 수험생들의 아침 이동길이 막히지 않도록 증시가 1시간 늦게 개장하고, 듣기 평가 시간에는 항공기 이착륙이 통제된다. 경찰 차량이 늦은 수험생을 시험장까지 호송한다. 부모들은 학교 밖에 모여 기도한다.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에 걸쳐 8시간 동안 치르는 이 시험은 비슷한 민주국가의 어떤 단일 시험보다 더 결정적으로 한국 젊은이의 인생 궤적을 좌우한다.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기록으로 확인될 만큼 심각하다. 한국의 청소년 자살률은 OECD 국가 가운데 최고 수준이다. 10~30세 한국인의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다. 2022년 중·고등학생 약 6만 명을 대상으로 한 정부 조사에서는 남학생의 4분의 1 가까이, 여학생의 3분의 1이 우울감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학업 압박과 이 위기의 관계는 논쟁적이지만, 현장 전문가와 연구자들은 폭넓게 그 연관성을 주장한다.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한국의 노동력을 길러낸 체계가 동시에 이 나라의 유년기를 단 하나의 표준화된 시험을 중심으로 조직해 왔으며, 그 결과가 평생의 진로를 너무도 효율적으로 결정하는 탓에 다른 무언가가 들어설 여지가 거의 남지 않는다는 점이다. |
위기
1996년 한국의 1인당 소득은 1만 4,000달러에 육박했다. 세계 11위 경제 대국이었다. OECD 회원국이기도 했다. 삼성, 현대, LG, 대우, SK 같은 재벌은 텔레비전과 자동차, 선박, 석유화학 제품을 세계 시장에 내놓는, 전 세계가 아는 브랜드였다. 한국 경제는 1979년 석유파동과 전두환 정권기의 정치적 격동, 민주주의로의 구조적 이행을 견뎌냈다. 1991~1996년 성장률은 연평균 7.8%였다. 물가는 안정돼 있었다. 경상수지 적자는 활발한 자본 유입으로 메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1997년, 수년간 응력이 쌓여 온 단층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IMF 자체의 사후 분석에 따르면 위기의 기원은 19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5년 엔화의 급격한 약세로 한국 수출품의 경쟁력이 떨어졌는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때 세계적인 반도체 공급 과잉으로 한국의 최대 수출품 가격이 폭락했다. 무역흑자는 적자로 돌아섰다. 그러나 구조적 문제는 더 깊었다. 한국의 은행들은 단기 외화 차입을 대거 늘렸고(1997년 11월 단기 부채는 한국 전체 대외채무의 58.8%를 차지했다), 그 자금을 암묵적 국가 보증 없이는 버틸 수 없었을 부채비율로 재벌의 확장에 쏟아부었다. 1997년 1월 한보그룹이 50억 달러의 빚을 안고 쓰러지고, 이어 삼미와 진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7월 기아자동차가 무너지자, 해외 채권자들은 자신들이 쥐고 있다고 믿었던 보증의 가치를 다시 따져 보기 시작했다.
연쇄 붕괴는 빠르게 진행됐다. 1997년 11월 말 한국의 가용 외환보유액은 겨우 2주치 수입액에 해당하는 50억 달러로 줄었다. 증시는 연말까지 시가총액의 49%를 잃었다. 원화 가치는 65.9% 떨어졌다. 11월 21일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12월 3일 합의된 지원 규모는 584억 달러로, 당시 IMF 역사상 최대였다. 이 금액은 위기의 규모와 함께, 국제통화체제에서 한국이 지닌 시스템적 중요성에 대한 IMF의 평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구제금융에 따라붙은 조건, 즉 재정 긴축, 자본시장 자유화, 은행 구조조정, 노동시장 개혁, 원화 안정을 위한 금리 인상은 빠르게, 그리고 논란 속에 시행됐다. 실업률은 불과 몇 달 만에 2~3%에서 8.7%로 치솟았다. 공장들이 문을 닫았다. 재계 2위 재벌 대우는 1999년 파산 절차에 들어가 결국 그룹 전체가 해체됐고, 자동차 부문은 제너럴모터스(GM)에 인수됐다. 1994년 50억 달러를 들여 출범한 삼성자동차는 2000년 르노에 매각됐다. 수십만 중산층 가정이 저축과 일자리를 잃었다. 평범한 시민들이 나라의 외환보유액 재건에 보태고자 금반지와 패물을 자발적으로 내놓은 1998년 초의 금 모으기 운동은 외환위기를 상징하는 문화적 기억이 됐다. 이후 거듭 회자되는 동시에 논쟁의 대상이 돼 온 집단적 희생의 순간이었다.
한국의 회복은 IMF 기준으로 보아도 놀랄 만큼 빨랐다. 재벌 체제에 반대하는 공약을 내걸었던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2월 취임해 IMF가 요구한 구조개혁과 선별적 경기부양을 함께 추진했다. 원화는 자유변동환율제로 전환됐다. 기업 재무에는 투명성 요건이 부과됐다. 2001년 한국은 IMF 차입금을 모두 상환했다. 1999년 GDP 성장률은 한국은행의 현행 수치로 11.6%였다(최초 발표치는 10.7%). 한국은 2년도 안 돼 580억 달러 규모의 비상사태에서 두 자릿수 성장으로 올라섰다.
| 위기 이후 재벌의 역설 1997년 위기는 재벌 지배를 무너뜨릴 것으로 널리 예상됐다. 어떤 면에서는 실제로 그랬다. 대우가 해체됐고, 기아는 현대에 인수됐으며, 주요 재벌 그룹의 수가 줄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위기는 재벌 권력을 공고히 했다. 신용경색으로 중소기업들이 쓸려 나가자, 살아남은 재벌들은 경제 전체에 비해 이전보다 더 커진 몸집으로 등장했다. 하청업체와 중소기업이 쓰러지면서 1998년 5대 재벌은 총산출의 37%, 수출의 44%를 차지했다. 김대중 정부와 이후 정부의 개혁가들이 거듭 해소하려 했던 한국 경제의 구조적 집중은 1997년을 견뎌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오히려 심화됐다. |
두 번째 기적: 반도체와 지식경제
1997년 이후 한국이 쌓아 올린 것은 그 이전과 구조적으로 달랐다. 철강, 선박, 화학, 자동차로 대표되는 중공업 모델은 사라지지 않았다. 포스코는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철강사 가운데 하나로 남았고, 현대차와 기아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자동차 브랜드가 됐으며, 한국 조선사들은 고난도 선박 시장을 계속 장악했다. 그러나 한국 경제성장의 핵심 고지는 결정적으로 반도체로 옮겨갔고, 이와 함께 규모 면에서 역사상 전례가 없는 형태의 산업 지배력이 등장했다.
삼성은 1974년 부천의 미국계 소기업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며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는 자생적 진출이 아니라 전략적 진출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1973년 중화학공업화 추진에서 전자를 6대 전략 업종 가운데 하나로 지정했다. 1980년대 내내 삼성, SK하이닉스(당시 현대전자), LG(당시 금성반도체)는 정책 자금과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D램 메모리 생산 능력을 키웠다. 기술은 미국 기업에서 라이선스로 들여왔고, 제조 공정은 흡수된 뒤 결국 개선됐다. 막대하고 꾸준한 생산설비 투자, 규율 있고 기술 훈련을 받은 노동력, 긴 투자 회수 기간을 견디는 인내를 요구하는 메모리 반도체에서 한국이 지닌 구조적 우위는 개발 모델이 길러낸 역량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2024년의 결과는 명백했다. 한국의 반도체 수출은 총 1,419억 달러로 전체 수출의 20.8%를 차지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합쳐서 세계 D램 생산능력의 약 70%, 낸드플래시 메모리의 50% 이상을 보유했다. 한국은 전 세계 반도체 생산능력의 약 20%를 차지했다. 한 업계 매체가 지적했듯 반도체는 ‘한국 경제의 쌀’, 즉 다른 모든 것이 기대는 없어서는 안 될 토대가 됐다.
AI 가속화는 이 지배력을 더 변동성이 크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무언가로 바꿔놓았다. AI용 GPU 가속에 필요한 적층형 D램 구조인 고대역폭메모리(HBM)는 글로벌 기술 공급망에서 가장 치열한 쟁탈 대상 가운데 하나가 됐다. 삼성보다 먼저, 더 공격적으로 HBM의 기회를 포착한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블랙웰 세대 가속기의 주력 공급사로 부상했다. 트렌드포스 자료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2024년 세계 HBM 시장의 52.5%를 차지했다. 변화는 극적이어서, 2025년 1분기 SK하이닉스는 처음으로 전체 D램 시장 점유율에서 36%를 기록하며 34%에 그친 삼성을 앞질렀다. 엔비디아의 품질 검증 과정에서 수율과 사양 문제를 겪은 것으로 알려진 삼성의 HBM 시장 고전은 2024~2025년 한국 반도체 업계를 규정하는 최대 비즈니스 이슈가 됐다.
| 기업 | 사업 분야 | 핵심 지표(2024~2025년) | 전략적 위상 |
| 삼성전자 | D램, 낸드, 파운드리 | 매출 기준 세계 최대 메모리 반도체 기업, 2025년 1분기 D램 점유율 약 34% | 선두이나 HBM에서 고전, 파운드리는 TSMC에 뒤처짐 |
| SK하이닉스 | D램, 낸드, HBM | 2025년 1분기 D램에서 삼성 추월(점유율 36%), 2024년 세계 HBM 점유율 52.5% | AI 메모리 주력 공급사, 엔비디아 핵심 파트너 |
| 한국(합계) | 반도체 수출 | 반도체 총수출 1,419억 달러(2024년), 세계 생산의 약 20% | 세계 최대 메모리 클러스터, 비메모리 역량 구축 중 |
세 번째 수출품: 문화
역사적으로 경제적 변혁은 상품과 자본의 관점에서 이해돼 왔다. 한국은 통상적인 방식으로는 측정하기 어려운 세 번째 범주의 수출품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21세기 들어 진정한 국력의 도구가 됐다. 바로 문화다.
한국 드라마와 대중음악이 동아시아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현상을 가리켜 1999년 중국 언론인들이 만든 말인 ‘한류’는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었다. 의도적인 정책 전환의 산물이었다. 1997년 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는 문화산업을 물적 자본이 거의 들지 않으면서 외화를 불균형적으로 많이 벌어들이고, 관광객 유입과 소비재 수출, 외교적 영향력으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성장 부문으로 지목했다. 문화부 예산이 대폭 늘었다. 대학에는 문화산업 관련 학과가 수백 개 신설됐다. 정부는 2012년까지 한류의 가치를 832억 달러로 추산했다.
이후의 수치도 상당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에 따르면 음악, 영상 콘텐츠, 비디오게임, 애니메이션, 웹툰 등 한국의 문화 콘텐츠 수출은 2023년 약 133억 달러로 해마다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흐름을 이어갔다. 한국국제교류재단에 따르면 전 세계 한류 팬은 2023년 2억 2,500만 명으로, 2012년 926만 명에서 약 24배 증가했다. 넷플릭스는 2023~2027년 한국 콘텐츠 제작에 25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2020년대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음악 그룹인 BTS는 ‘미래세대와 문화를 위한 대통령 특별사절’로 직접 임명됐다. 한국어로 글을 쓰는 작가로는 처음으로 받은 한강의 2024년 노벨문학상은 1953년은 물론 1987년에도 상상할 수 없었을 문화적 자신감을 보여줬다.
한류의 경제적 파급효과는 여러 경로로 나타난다. 관광: 정부의 2025년 외래관광객 조사에서 응답자의 40.1%가 한국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로 한국 문화 콘텐츠를 꼽았으며, 이는 가장 많은 응답이었다. 소비재: K뷰티 화장품과 스킨케어는 글로벌 카테고리로 자리 잡았고, 수출액은 틈새 부문에서 주류 산업 규모로 커졌다. 음식: 김치와 비빔밥, 그리고 세계적 현상이 된 불닭으로 대표되는 한식은 계속 확장하는 수출 품목군을 만들어냈다. 기술: 삼성의 K팝 투어 후원과 브랜드 정체성·문화 콘텐츠의 결합은 문화 수출 경제와 산업 수출 경제 사이의 시너지 순환을 보여준다.
한류 현상은 지정학적 취약성도 드러낸다. 2016년 한국이 사드(THAAD)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를 결정하자(북한의 핵 개발 가속화에 대응해 미국과 협력해 내린 전략적 선택이었다) 중국은 한국 문화 상품에 대한 비공식 보이콧으로 응수했다. 중국 스트리밍 플랫폼들은 한국 콘텐츠를 내렸다. 중국 정부는 자국민의 한국 단체관광을 금지했고, 2017년 중국인 방한객은 절반 가까이 줄었다. 경제적 타격은 실질적이었으며, 지정학적 결정에서 비롯됐음이 분명히 확인됐다. 문화도 한반도의 안보 딜레마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풀리지 않은 재벌 문제
한국 경제에 대한 진지한 분석이라면 재벌 문제를 피해 갈 수 없다. 이 문제는 60년 동안 서울과 개발경제학계에서 논쟁돼 왔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답은 어떤 지표를 우선시하고 어떤 시간 범위를 살펴보느냐에 따라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재벌 체제를 옹호하는 근거는 앞서 본 데이터가 보여준다. 한국의 산업 변혁은 국가의 지휘를 받는 대규모 다각화 기업집단에 자본을 집중 배분함으로써 이뤄졌다. 자본이 부족하고 자원이 빈약한 전후 경제에서 시장이 자생적으로 발전하기를 기다리는 대안은 애초에 선택지가 아니었다. 중화학공업화를 실행한 것은 재벌이었다. 조선소를 지은 것도, D램 칩을 만든 것도 재벌이었다. 재벌은 해외 기술을 흡수하고 개량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산업의 토대로 삼았다. 재벌이, 혹은 재벌과 아주 비슷한 무언가가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은 아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 논거 역시 데이터가 보여준다. 1997년 위기는 암묵적 국가 보증과 불투명한 은행 관계가 가능하게 한 재벌의 과도한 차입이 낳은 직접적 결과였다. 위기 이후 살아남은 재벌 그룹들은 지배력이 줄기는커녕 더 커졌다. 재벌 체제의 기업 지배구조는 여전히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지배주주인 총수 일가가 막대한 사적 이익을 챙기는 반면, 분산된 일반 주주들은 시스템 위험을 떠안는다. 화이트칼라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거나 기소된 재벌 총수 명단은 길고, 여야 정권을 가리지 않는다. SK그룹 최태원, 현대 정몽구, 한화 김승연, 롯데 신동빈, 삼성 이건희 회장 등이다. 그리고 유죄 판결 뒤 대통령 사면이 뒤따르는 관행은 수십 년에 걸쳐 경제 권력이 법적 책임을 막아준다는 굳은 기대를 만들어냈다. HBM 품질 검증과 TSMC와의 파운드리 경쟁에서 삼성이 현재 겪는 법적·경쟁적 어려움은 가족 경영 기업집단이 AI 시대에 필요한 혁신 주기에 구조적으로 잘 적응하지 못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생산성 데이터는 이런 우려를 뒷받침한다. 한국의 노동시간당 GDP는 여전히 OECD 평균을 크게 밑도는데, 이는 한국의 소득 수준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CEBR은 2023년 분석에서 재벌의 지배가 국내 기업을 해외 경쟁으로부터 보호하는 문화를 만들어 생산성 향상에 필요한 경쟁 압력을 떨어뜨렸다고 지적했다. 구글 지도 사례, 즉 한국이 오랫동안 구글의 고정밀 국가 지도 데이터 국외 반출을 허용하지 않은 일은 국내 내비게이션 서비스를 보호하려는 조치로 널리 이해되는데,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안보 조치일 수도 있고 여전히 기존 국내 기업의 이익을 중심으로 짜인 경제의 징후일 수도 있다.
| 박근혜 탄핵과 기업의 책임 2016~2017년 한국은 재벌과 정치의 접점을 이례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낸 헌정 드라마를 겪었다.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은 공식 직책 없이 사적 친분을 이용해 한국 최대 재벌들로부터 자금과 특혜를 끌어낸 측근 최순실과의 관계에 얽힌 부패 혐의로 탄핵되고 결국 수감됐다. 삼성 이재용은 뇌물 혐의로 수감됐다가 이후 풀려났고, 결국 윤석열 대통령에게서 특별사면을 받았다. 이 사건은 재벌 지배구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다만 그 지배구조의 본질과 국가 권력과의 유착을 유례없이 뚜렷하게 드러냈다. |
헬조선: 해어지는 사회계약
2015년 가을,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에서 한 표현이 돌기 시작했다. 대표 경제 지표에 가려져 있던 세대의 환멸을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포착한 말이었다. 영어 단어 ‘헬(hell)’과 1392년부터 1897년까지 한반도를 다스린 조선 왕조의 이름을 합친 ‘헬조선’은 현대 한국을 중세 신분제의 경쟁적 잔혹함을 지닌 사회, 즉 태어난 배경이 결과를 결정하고, 노력이 공정하게 보상받지 못하며, 계층 이동을 보장한다는 제도들이 주로 기존 특권을 재생산하는 데 기능하는 사회로 묘사했다. 2019년 무렵에는 그 후속편 격인 ‘탈조’, 즉 ‘탈조선’이라는 말이 뒤를 이었다. 젊은 한국인들이 전후 처음으로 이민을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표현은 세대의 저항이 늘 그렇듯 과장이었다. 동시에 상당히 폭넓은 실증 지표로 볼 때 맞는 말이기도 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이 문제의 구조적 핵심이다. 통계청의 2023년 8월 조사에 따르면 한국 임금근로자의 37.0%, 즉 812만 명이 기간제, 시간제, 간접고용 등 비정규직으로, 정규직이 누리는 사회적 보호와 경력 경로에서 배제돼 있었다. 비정규직의 평균 임금은 정규직의 약 54%였다. 비정규직의 60% 이상은 퇴직급여나 퇴직금이 없었다. 공식 실업률은 약 2.8%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이는 심각하게 오해를 부르는 숫자다. 공식 통계상 실업자는 아니지만 장기간 취업 준비를 하거나, 추가 학위 과정에 등록하거나, 정규직을 구하는 동안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막대한 수의 청년층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 한국경제연구소(KEI)는 2017년 청년의 18.4%가 취업도, 교육이나 직업훈련도 받지 않는 ‘니트(NEET)족’이었으며, 한국 니트족의 45%가 고등교육 학위를 보유해 OECD 전체의 18%와 대비됐다고 지적했다.
주거는 압박의 두 번째 축이다. 디플로맷(The Diplomat)이 2025년 7월 내놓은 한국 불평등 분석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은 2024년 말 13억 원(약 96만 달러)을 넘어 가구 연소득 중위값의 13배를 웃돌았다. 2023년까지 10년 동안 서울 아파트값은 두 배 넘게 올랐다. 한국 가계 총자산에서 주택이 차지하는 비중은 75%가 넘는다. 집값 급등 이전에 부동산을 물려받은 가정과 그렇지 못한 가정은 구조적 의미에서 서로 다른 경제 계급이다. 2022년 기준 한국 20대의 81%가 부모와 함께 살았는데, 이는 OECD 최고 수준이자 OECD 평균의 1.6배로, 주된 이유는 감당할 수 없는 주거비였다. 주택 구입 능력 분석들은 중위값끼리 비교하는 더 엄격한 기준으로 2024년 주택 중위 가격이 가구 연소득 중위값의 15~17배에 달했다고 기록했다.

통상적인 방식으로 측정한 전체 소득 불평등 데이터는 체감되는 심각성을 담아내지 못한다. 2021년 한국의 지니계수는 0.329로 선진국 가운데 중간 수준이다. 미국(0.418)보다 낮고 일본(0.323)과 대체로 비슷하다. 그러나 OECD의 2022년 측정에서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었고, 한국인 6명 중 1명 가까이가 빈곤선 아래에서 살고 있었으며, 약 40%에 이르는 노인 빈곤율은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지니계수는 중간인데 빈곤율은 높은, 모순처럼 보이는 이 현상은 고성장기에 적절한 사회보험을 구축하지 못한 개발 모델의 실패가 낳은 노인 빈곤의 집중, 그리고 세대 간 자산 가치의 급격한 격차를 반영한다. 고성장기에 부동산을 사들인 노년층은 나라 전체 주택 자산의 상당 부분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런 자산이 없는 같은 세대의 상당수는 OECD 최고 수준의 노인 빈곤율에 직면해 있다. 학력 인플레이션과 불안정 고용, 감당할 수 없는 주거비를 배경으로 2010년대와 2020년대에 노동시장에 들어선 청년층은 상당수가 그런 완충 장치가 없다.
이러한 불만은 정치적으로 한국 청년 여론의 지속적인 급진화로 표출됐다. 그 통로는 이전 세대가 활용한 노동운동이 아니었다. 노동운동의 통로는 민주화 이행과 이후 재벌의 노동시장 지배 속에서 상당 부분 해체되거나 무력화됐다. 대신 온라인 커뮤니티와 문화 창작, 주기적인 거리 동원이 그 통로가 됐다. 박근혜 탄핵을 요구하며 절정기에 170만 명을 서울 거리로 불러낸 2016년 촛불혁명은 헌정 위기이자 부패 스캔들이었고, 동시에 세대의 반란이었다. 계급과 기생, 그리고 교육받은 빈곤층의 절박함을 그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2019년 작 ‘기생충’은 한국 문화가 헬조선이라는 주제를 형상화한 작품 가운데 상업적·비평적으로 가장 성공한 작품이었다. 그 영화가 세계를 향해 직접 말을 걸었고 또 상을 거머쥐었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인정이었다.
| ‘삼포세대’와 유예된 구조적 선택 한국 사회학자들은 2010년대 초 연애, 결혼, 출산이라는 세 가지 전통적 인생 이정표를 포기한, 혹은 포기를 강요당한 청년들을 가리켜 ‘삼포세대‘라는 말을 만들었다. 이 개념은 이후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를 더해 다섯 가지를 포기한 ‘오포세대‘로, 다시 꿈과 희망까지 더해 일곱 가지를 포기한 ‘칠포세대‘로 확장됐고, 결국 포기한 것의 수를 헤아릴 수 없다는 ‘N포세대’에 이르렀다. 이런 어휘의 증식 자체가 일종의 데이터였다. 2년마다 사회적 체념의 단계를 가리키는 새 어휘를 만들어내는 사회는 단순히 순환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무언가가 잘못된 사회다. 0.75라는 출산율, 집값, 노동시장 이중구조, 교육비 지출의 악순환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문제다. 성장의 과실을 분배하는 수단이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발전 모델이라는 문제다. |
인구 절벽
2026년 한국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경제적 사실은 반도체나 재벌, 한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것은 하나의 숫자, 0.75다.
2024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여성 1명당 0.75명으로, 현대 경제에서 기록된 사상 최저치인 2023년의 0.72명을 겨우 웃돌았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보다 낮고, 인구학자들이 수십 년간 연구해 온 다른 어떤 저출산 OECD 국가보다도 낮다. 인구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대체출산율은 2.1명이다. 한국은 그 3분의 1 수준이며, 하락 추세가 20년 넘게 이어져 왔다. 2023년에는 0.72명까지 떨어졌다. 2024년 0.75명으로 소폭 반등하자(팬데믹 이후 미뤄졌던 결혼이 몰린 효과로 보인다) 인구학자들은 진심으로 안도했지만, 이내 구조적 현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결과는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으며, 현재 전망대로라면 심각하다. 2024년 말 한국은 65세 이상 인구가 20%를 넘는, 유엔이 정의하는 ‘초고령사회’가 됐다. 한국이 이 문턱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7년으로, 일본의 11년, EU의 19년과 대비된다. 2030년이면 한국인 4명 중 1명이 65세 이상이 된다. 한국은행은 현재의 출산율이 지속되면 2050년까지 한국 경제가 지속적인 마이너스 성장에 빠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OECD는 ‘2024 한국경제보고서’에서 노년부양비가 현재 28%에서 2082년 117%로 치솟을 것으로 전망했다. 의료, 연금, 장기요양 비용은 2060년까지 GDP 대비 비중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 2006년 이후 출산 장려 인센티브에 360조 원 이상(약 2,700억 달러)을 썼고, 학술지 ‘의료윤리저널(Journal of Medical Ethics)’에 실린 2024년 논문은 이 지출의 윤리성을 주제로 삼았다. 출산장려금, 주거 지원, 세제 혜택, 남성 육아휴직 확대 등 출산 장려 정책의 모든 수단이 동원됐다. 그 기간 대부분에 걸쳐 출산율은 계속 떨어졌다. 경제정책연구센터(CEPR)는 2025년 VoxEU 분석에서 초저출산이 한국의 극도로 빠른 경제 근대화와 전통적 성 규범 및 노동 문화의 지속 사이의 구조적 불일치가 낳은 결과라고 결론지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클로디아 골딘은 2024년 NBER 워킹페이퍼에서 한국 같은 나라들이 ‘오늘날 초저출산율을 보이는 것은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근대에 내던져진 반면, 시민들의 신념과 가치관, 전통은 더 느리게 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한국 여성의 학력은 OECD 최고 수준이다. 그런데 한국 여성이 마주하는 성별 임금 격차는 OECD에서 가장 크다. 이 조합은 결과를 예견케 한다.
인구 위기는 복지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끝없이 늘어나고 점점 더 숙련되는 노동력이라는 논리 위에 개발 모델을 세운 나라에게 이것은 경제적 정체성의 문제다. 정책적 자본 축적, 수출지향 제조업, 교육 투자 등 한국 경제 모델의 모든 측면은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 인구 궤적에 맞춰져 있었다. 출생아 수는 1995년 71만 5,000명에서 2024년 23만 8,000명으로 줄었다. 이 급감이 노동력에 미치는 영향은 2040년대에 본격적으로 체감될 것이다.
| 인구 지표 | 수치 | 비교 |
| 합계출산율(2024년) | 0.75 | OECD 대체출산율: 2.1, 세계 최저 |
| 65세 이상 인구(2024년 말) | >20% | 유엔 ‘초고령’ 기준 돌파 |
| 출생아 수(2024년) | 23만 8,000명 | 1995년 71만 5,000명에서 감소 |
| 여성 평균 초혼 연령 | 31.3세(2022년) | 1960년대 이후 꾸준히 상승 |
| 2082년 노년부양비 | ~117% | 현재 28%, 세계에서 가장 빠른 상승이 예상되는 국가 중 하나 |
| 출산 장려 정부 지출(2006년 이후) | 약 2,700억 달러 | 합계출산율에 유의미한 효과 관찰되지 않음 |
2025~2026년: 심판의 시간
2025년 한국은 이 나라의 현대사를 규정해 온 구조적 긴장 대부분, 즉 민주주의의 취약성, 재벌 지배구조, 수출 의존, 지정학적 노출이 단 한 번의 뉴스 사이클 안에 압축된 상황에서 새해를 맞았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가 북한과 연계된 ‘반국가 세력’에 장악됐다고 주장하며 1979년 이후 처음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회는 6시간도 안 돼 이를 거부했다. 윤 대통령은 12월 14일 탄핵소추됐다. 2025년 4월 4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일치(8대 0)로 탄핵을 인용했다. 12월 계엄 선포 직후 원화 가치는 15년 만의 최저치로 떨어졌다. 기업 심리는 급랭했다. 한국은행의 기업심리지수(CBSI)는 2024년 11월 91.8에서 2025년 1월 85.9로 떨어지며 2020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반면 채권시장은 정치와 신용을 구분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위기 내내 한국 국채를 계속 사들여 2025년 4월 한 달에만 116억 달러를 순매수했다. 2025년 1분기 실질 GDP는 0.2% 감소했다.
위기는 이미 경제가 취약해진 시점에 닥쳤다. 2023년 성장률은 1.4%에 불과했다. 반도체 사이클은 꺾여 있었다. 엔비디아의 HBM 품질 검증 과정에서 삼성이 고전하면서 삼성의 반도체 매출과 주가, 그리고 한국 경제와 주식시장에서 삼성이 차지하는 압도적 비중을 감안하면 코스피 전체가 짓눌렸다. GDP의 약 절반을 차지하는 내수 소비는 높은 가계부채와 고금리 탓에 2019년 이후 만성적으로 부진했다.

대외 환경은 이런 내부 압력을 가중시켰다.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 공세를 강화해 2025년 4월 한국산 제품에 25%의 ‘상호관세’를 발표했고(이 관세는 며칠 만에 유예돼 10% 기본관세로 대체됐다가 7월 합의에서 15%로 확정됐다), 6월 이재명 대통령 취임 당일에는 한국산 철강·알루미늄에 대한 50%의 품목별 관세가 발효됐다. 한국 수출품에 대한 미국의 실효 관세율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아래 0%에 가깝던 수준(2024년 0.2%)에서 2025년 연평균 8.3%로 치솟았고, 연중반에는 12%를 웃돌며 정점을 찍었다. 2024년 미국은 한국 전체 수출의 18.7%를 차지했다. OECD는 2025년 한국 성장률 전망치를 2.1%(2024년 12월 전망)에서 2025년 6월 1.0%로 낮췄고, 한국개발연구원(KDI)은 0.8%를 전망했다.
2025년 6월 대통령에 당선된 이재명은 이런 배경 속에서 취임했다. 그의 공약은 재분배, 국가 주도 공공투자, 중소기업 지원, 그리고 북한과의 대화 재개에 방점을 찍었다. 추가경정예산, 통화 완화,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세 협상 등 그가 내놓은 초기 경제 신호는 정석적인 위기관리였다. 구조적 과제는 여전히 손대지 못한 채 남아 있다. 재벌 지배구조 개혁, 노동시장 유연화, 인구 감소를 상쇄할 만한 이민 정책, 그리고 한국 번영의 기반인 반도체 공급망을 쪼갤 위험이 있는 미·중 기술 디커플링을 헤쳐 나갈 통상 전략이 그것이다.
| 통일의 셈법 한국의 경제적 미래는 한반도에서 가장 명백한 구조적 변수를 빼놓은 채 논의되는 경우가 많다.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조밀하고 경제적 생산성이 가장 높은 도시 회랑 가운데 하나와 육상 국경을 맞댄 채, 핵으로 무장한 군사 국가 북한이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현재 남한의 1인당 GDP는 한국은행 추정치로는 북한의 약 30배, 유엔 수치로는 50배가 넘는다. CEBR은 남한 수준의 생활수준을 갖춘 통일 한국이라면 지금 당장 세계 8위 경제 대국이 될 것이며, 2032년 영국을 제치고 2037년에는 6위에 오를 수 있다고 추산했다. 약 2,600만 명에 이르는 북한 인구와 더 풍부한 천연자원, 즉 1953년 분단의 구조적 불리함 가운데 하나였던 광물 자원은 통일 국가에 더해질 잠재적 경제 자산이다. 통일의 셈법에는 통합 비용도 포함된다. 서독의 경험에 비춰 보면 북한의 생산성과 인프라를 남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수십 년에 걸쳐 수조 달러 규모의 투자 이전이 지속돼야 한다. 셈법은 흥미롭다. 정치는 여전히 풀기 어렵다. |
기적이 말해주는 것
전쟁으로 황폐해진 생존 경제에서 약 70년 만에 G20의 반도체·문화 강국으로 거듭난 한국의 변신은 현대사에서 가장 빠른 대규모 발전 사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세계은행은 한국을 20세기 빈곤 감소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 중 하나로 평가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FRED 데이터베이스가 명목 달러 기준으로 측정한 한국의 1인당 소득은 2024년 3만 6,238달러로, 그 소득의 더 커진 구매력을 감안하기 전에도 1953년 기준치의 500배가 넘는다.
개발경제학자, 정치학자, 역사학자들이 이 기록에서 끌어낸 교훈은 논쟁적이며,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유화, 민영화, 규제 완화만으로 발전이 이뤄진다는 워싱턴 컨센서스의 서사는 처음 30년간의 한국 기록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한국 국가는 자본을 배분하고, 산업을 보호하고, 금융을 통제하고, 노동을 억압하고, 무역을 관리했다. 1961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통상적인 의미의 자유시장경제가 아니었다. 세계 시장이 부과한 수출 규율이 이 국가주의적 틀 안에서 시장의 검증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신자유주의 처방과 깔끔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교훈이 단순히 ‘권위주의가 통한다’는 것도 아니다. 박정희가 시작한 개발 드라이브는 1987년 민주화 이행기와 그 이후에도 수정을 거치며 이어졌다. 권위주의 시기에 이뤄진 교육, 인프라, 기술 역량에 대한 제도적 투자는 실질적이었고 오래 지속됐다. 정치적 탄압은 이런 투자의 필요조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투자를 단행한 바로 그 정권에 함께 존재한 특징이었다. 민주적 통치 아래였다면 한국의 성장이 어떤 모습이었을지는 역사적 기록으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사례에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었다는 점이다. 실질적 역량과 일관된 제도적 권위를 갖춘 국가, 집단적 진보를 위해 소비를 미룰 의지가 있는, 교육받고 규율 있으며 문화적으로 응집된 노동력, 미국의 안보 보장과 일본의 기술 이전, 베트남전 특수, 개방된 서방 수출 시장처럼 역사적으로 우연적이며 원한다고 재현할 수 없는 외부 조건, 그리고 집중적인 자본 배분을 바탕으로 특정 산업 부문에 건 일련의 전략적 베팅이 수십 년 단위의 시간에 걸쳐 결실을 본 것이다. 그 베팅은 실패할 수도 있었다. 포스코는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여겨졌다. 한국 조선업은 생존할 수 없다고 여겨졌다. D램 반도체는 한국의 산업이 될 수 없다고 여겨졌다. 이들이 성공한 것은 자본과 실행력, 그리고 운 덕분이었으며, 각각이 얼마만큼 작용했는지는 여전히 가려내기 어렵다.
2026년의 곤경은 어떤 의미에서 1963년의 성공 그 자체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고 속도로 스스로를 바꿔 온 나라가 이제 그 속도의 사회적 비용과 마주하고 있다. 경쟁 압력에 지친 인구를 반영하는 출산율, 성취감 없이 학위만 안겨주는 교육 체계, 청년들의 손이 닿지 않는 가격의 주택시장, 그리고 현대의 삶과 너무도 어긋나 나라 전체가 재생산을 거부하게 만든 성별 계약이 그것이다. 반도체 제국은 실재한다. 인구의 셈법 역시 실재한다.
다시 돌아온 주제: ‘암울’의 재정의
1961년 로젠탈은 전쟁의 상흔과 인구 과잉, 빈곤 때문에 전망이 ‘암울하다’고 했다. 2026년의 전망도 다시 암울하게 느껴진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유는 거의 정반대다. 고속 사회의 피로, 인구 축소, 그리고 다시 불거진 정치적 불안정이다.
65년 전 A.M. 로젠탈은 전쟁의 상처를 안은 채 원조에 기대던 한국을 살펴보고 전망이 ‘암울하다’고 선언했다. 결국 그는 철강과 실리콘, 그리고 순전한 국민적 의지가 빚어낸 기적에 의해 틀린 것으로 판명됐다. 그러나 2026년 인구와 정치의 진동을 헤쳐 나가는 한국에서 ‘암울’이라는 그 단어가 다시 국가적 담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번 위협은 산업의 부재가 아니라 그 성공의 무게다. 한강의 기적은 완성됐다. 이제 과제는 그 여파를 견뎌내는 것이다.
한국의 다음 70년에는 첫 70년과는 다른 종류의 변혁이 필요할 것이다. 그 수단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그 결과 또한 진정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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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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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OECD. Women, Work and the Population Puzzle (2025). https://www.oecd.org/en/publications/women-work-and-the-population-puzzle_3711a72f-en.html
33. Statistics Korea. Social Indicators in 2024 and related birth/fertility releases showing a 2024 fertility rate of 0.75 and 238.3 thousand live births. https://sri.kostat.go.kr
34. Bank of Korea. Research and policy materials on aging, labor-force decline, and long-run growth. https://www.bok.or.kr/eng/
2024–2026 Politics and the Recent Economic Shock
35. Reuters. “South Korea’s Yoon removed from office over martial law, election looms” (4 April 2025). https://www.reuters.com/world/asia-pacific/south-koreas-impeached-president-yoon-faces-court-ruling-decide-his-fate-2025-04-03/
36. Reuters. “South Korea’s acting president orders emergency measures over U.S. tariffs” (3 April 2025). https://www.reuters.com/world/asia-pacific/south-koreas-acting-president-orders-emergency-measures-over-us-tariffs-2025-04-02/
37. Reuters. “South Korea to minimise impact of 50% tariff on steel products, ministry says” (2 June 2025). https://www.reuters.com/world/asia-pacific/south-korea-minimise-impact-50-tariff-steel-products-ministry-says-2025-06-02/
38. Korea Development Institute. KDI Economic Outlook, 2025 first-half edition. https://www.kdi.re.kr/eng/research/economy
39. Reuters. Coverage of Lee Jae-myung’s June 2025 inauguration and initial economic agenda. https://www.reuters.com/world/asia-pacific/
Supplementary comparative and analytical sources
40. OECD. Korea country pages and comparative data portals on productivity, labor markets, education, and inequality. https://www.oecd.org/korea/
41. World Bank Data. Korea, Rep. macroeconomic indicators and comparative development series. https://data.worldbank.org/country/korea-rep
42. Brookings Institution. “Korea’s Path from Poverty to Philanthropy.” https://www.brookings.edu/articles/koreas-path-from-poverty-to-philanthropy/
43. Centre for Economics and Business Research. “Sustaining the Economic Miracle: South Korea to Break Global Top Ten by 2026.” https://cebr.com/blogs/sustaining-the-economic-miracle-south-korea-to-break-global-top-ten-by-2026/
44. Rosenthal, A. M. “Outlook Dreary for South Korea.” The New York Times, March 21, 1961 (as cited in Seth, M. J. “An Unpromising Recovery,” Education About Asia 18:3, 2013).


